-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 나폴레옹 루트 800km. 정년퇴직을 앞둔 공로 연수 기간에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꺼내 실행에 옮겼다.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까지는 걸어서 34일을, 그 후엔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를 버스로 이동하는 총 40일 일정이었다. 나는 평소 걷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에 순례 길도 잘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만이었다. 험악한 날씨에 피레네산맥을 넘었더니 걷기 3일 차부터 다리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새끼발가락이 성이 나 빨개지더니 발목과 다리로 통증이 옮겨 다녔다. ‘팜플로나’의 약국에서 스페인 약사는 내 발톱이 빠질 거라고 했다. 진통제와 골무처럼 생긴 발가락 보호대를 구입하고 카페 ‘이루나’에서는 심란함을 감추기 위해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 바(Bar)는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이루나 2층에는 그가 즐겨 앉았던 테이블과 의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순례 길을 여러 날 걷다 보면 사람마다 제각각의 불편을 한두 가지씩 갖고 있다. ‘로그로뇨’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이태리 모녀 중 엄마의 발은 나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순례자 대부분이 좋은 컨디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다리 상태가 계속 나빠져 결국 병원을 갔다. 의사는 내가 순례자라고 엑스레이실을 직접 데리고 가고 소염진통제는 무료로 주었다. ‘아헤스’의 알베르게 주인은 아픈 순례자라고 따끈한 수프와 닭고기 요리를 돈도 받지 않고 내왔다.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는 내 다리에 테이핑을 해 주고 직접 끓인 뱅쇼를 계속 마시게 했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받은 친절은 항상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제니퍼는 ‘아르수아’를 떠나기 전에 특별한 낙인 쎄요를 찍고 가라고 했다. 낙인 쎄요는 도장 찍듯이 찍히는 쎄요와 달리 엠보싱으로 돋을무늬가 박히는 것이었다. 쎄요는 그곳을 방문했다는 것을 인증하는 도장으로 순례자의 신분증인 크레덴시알에 찍는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한 발목을 갖고 있어 늘 다른 사람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니 쎄요를 찍겠다고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제니퍼의 말을 무시하고 이른 새벽에 다음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살세다’에서 제니퍼를 다시 만났다. 루마니아 사람 ‘이우넛’과 함께였다. 엄청 울었다. 속울음의 끝을 잡고 다니던 나를 무장 해제시키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 사람. 아픈 다리로 걷는 나를 응원하겠다고 ‘아르수아’에서 ‘살세다’까지 조건 없이 와 준 사람. 특별한 낙인 쎄요의 주인공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우넛은 한쪽 다리가 의족이었다. 그는 걸을 수 없는 신체조건 때문에 작은 도시에서 순례자를 위한 바(Bar)를 운영한다고 했다. 제니퍼에게 내 얘기를 듣고 응원하기 위해 바의 문을 닫고 왔다고 했다. 크기가 보이지 않는 이우넛의 마음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제니퍼의 배려가 몰고 온 울림으로 마음이 많이 아렸다. 인생의 가을날, 스페인의 한적한 길 위에서 맞닥뜨린 신선한 파장. "나도 걷고 싶다."는 이우넛과 제니퍼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길로 사람들이 모여들면 너나없이 하나가 되었다. 함께 서로의 상처를 걱정하고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잠시 쉬려고 들어간 바에서 아침에 헤어졌던 한국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내 발 상태를 걱정하던 남편이 무료로 수지침을 놓아주겠단다. 발목이 좋아진다면 어떤 치료인들 마다하겠는가. 압박 붕대를 풀고 보니 왼쪽 발등과 발목이 소복하게 부어있었다.
‘그래, 난 순례 길을 여행하는 여행자이지 종교적인 순례자는 아니야. 그러니 걷기도, 차를 타기도 할 수 있지. 그 대신 순례자들과 같은 코스를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자.’
통증이 매우 심해 발을 땅에 댈 수 없었던 몇 날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걸을 때는 등산화를 가방에 매단 채 슬리퍼를 신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성 야곱에게만 고난의 길이 아니라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내게도 고난의 길이었다. 걷는 내내 발톱에서 시작한 심술꾸러기는 다리까지 괴롭혔다. 발걸음이 잘 옮겨지지 않았다. 카미노 길에서 협찬 인생을 살고 있다고 농담처럼 읊조렸지만 정말 그랬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토끼라고 주장하며 거북이처럼 걸었다. 내 발목 상태로는 최선의 걸음이었다.
800km를 우여곡절 끝에 완주했다. 끝까지 내 다리를 걱정하며 함께 걸어준 라푼젤 언니, 비 내리는 새벽에 “괜찮아, 어렸을 적에 논물 많이 삶아봤어.”라며 자신은 물웅덩이에 빠져 첨벙 대면서도 내 앞으로 불빛을 비춰주던 여수 형님, 차를 태워주던 전 부장. 이들은 내 다리가 얼마나 아픈지를 읽어주었다.
귀국하기 바쁘게 마중 나온 남편과 병원부터 갔다. 나를 힘들게 한 그 심술꾸러기는 ‘피로골절’이었다. 의사는 반 깁스가 아닌 통 깁스를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하다고 했다. 의아스러웠다.
“어! 스페인에서는 의사가 염증이라고 했는데요.”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피로골절 초기엔 실금이 보이지 않아요.”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던 이유, 걷지 못했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스페인 의사가 염증이라 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처럼 ‘뼈는 괜찮다.’는 현지 의사의 말 한마디가 나를 계속 걷게 했다. 미련스러움이 하늘을 뚫고 부처님 손바닥도 빠져나갔지만 염증인 줄 알았기에 완주가 가능했다.
내 안의 나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으로 집을 나섰으나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겨냈다. 세상의 별별 사람을 다 보며 ‘인간답게’를 생각했다. 그리고 만났다, 인간다운 사람들을. 부엔 카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