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서 Nov 24. 2019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part 1.

영화 <박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      


초봄, 연두색 논밭이 고요한 시즈오카(靜岡) 땅.

그 지평선 위로 새하얀 산의 뿌리가 성큼, 모습을 드러낸다.


신오사카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약 두 시간을 달려오자, 말로만 듣던 후지산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시속 200킬로, 아니 300킬로미터 가까운 속도로 도쿄를 향해 달려가는 신칸센의 속도가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아주 유유히, 고요하게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관을 쓴 곧게 솟은 산. 저 산이 말로만 듣던, 사진으로만 보던 후지산이구나. 예기치 못한 대자연의 출몰에 넋을 놓고 창 밖을 바라본다. 낯선 풍경이다.


길쭉한 일본 섬 서쪽의 칸사이(관서)지방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 관동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낯선 땅이었다. 돈부리(일본식 덮밥)를 먹던 허름한 동네 밥집에 걸려 있던 달력에서나 봤던, 4학년 사회 교과서 표지에 인쇄되어 싸인펜으로 낙서를 그려 넣었던 그 산을, 20년이 지나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이야. 신기한 일이다. 하긴, 어찌 보면 내가 지금 이 신칸센을 타고 동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참 신기한 일이다. 문득,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본다. 11시가 슬쩍 넘었다.

약 2시간 후면 영화 <박열>의 일본 관객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후지산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2019년 3월.


2.      


“어쩌면 내가 이걸 위해 <박열>을 찍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어.”     


흑산도에 다녀오신 이준익 감독님의 얼굴은 고운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담배를 끊으셔서 일까. 행복하게 오토바이를 타셔서 일까. 3년 전에 처음 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건강해 보이시는 진갈색 얼굴. 그 위 촘촘히 난 흰 수염이 빛난다.      


“일본에서 극장 개봉하는 거요?”

내가 물었다.     


“응. 일본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일본 사람들이 볼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줄곧 내 안에 있었기에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가 일본 무대인사 갔다 온 사진 보내줬잖아. 일본 평론가들이 쓴 글들이랑…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박열과 후미코, 그 주변인물들을 구상할 때부터 감독님께서 가장 유의하셨던 것은 ‘일본 사람들이 봐도 일본인 같은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의 일본 관복부터 시내 풍경, 박열과 후미코가 쓰던 원고지 종이, 하물며 줄 간격까지 신경을 쓰셨던 것은 이 영화가 한국을 넘어 일본까지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박열>은 박열뿐만 아니라 박열과 함께 싸웠던 후미코라는 일본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아가 이 둘뿐 아니라, 국적과 성별을 넘어 함께 제국주의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몸을 던져 싸웠던 한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의 이야기이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이야기는 관동대지진이라는 일본 근대 역사상 가장 큰 비극적인 자연재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피해자가 일본인뿐이 아니었다는 일본의 사실(史実) 이면에 숨겨진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2016년 겨울, <박열>의 시나리오 작업부터 감독님과 함께 해 온 나 또한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 은폐되거나 잊혀진 인물을 발견하고 이들을 재창조한다는 것은, 배우의 책임감을 넘는 큰 무게를 업는 일이라는 것. 더욱이 그 인물들이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면, 이 영화의 종착지가 사실은,  일본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일본이어야 된다는 것을.


그러나 일본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조선인의 대역죄인, 그의 일본 여성 동지, 그리고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일본인들이 믿기나 할까?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개봉을 반대할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수입해서 누가 배급을 할까? 누가 보러 올까?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었던 나에게 어느 날, 이준익 감독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이준익 감독님: 박열 일본 개봉용 포스터야 ^^ 일본 제목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일본에서 올해 2월부터 개봉해 무려 4개월 간 상영했던 영화 <가네코후미코와 박열> 포스터


3.


“후지산 보셨죠?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렇게 잘 보인 거죠. 희서 상 운이 좋으시네요.”

      

도쿄역에 도착하자, 다른 칸에 타고 오신 일본 배급사 대표님 코바야시 상이 내 짐을 함께 내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처음 뵀을 때, 검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저 이래봬도 환갑 넘었습니다”라고 싱긋 웃으시던 코바야시 상은 그을린 얼굴과 상반되는 풍성한 은발 머리가 매력적이었다.


‘우즈마사’라는 작은 영화배급사의 대표이자, 전 연극배우인 코바야시 상을 처음 만난 건, 올해 1월 말, <박열> 일본 개봉이 확정되어 현지 홍보를 위해 동경을 방문했을 때였다. 세월 묻은 윤기가 자르르 나는 가죽 재킷을 입고 공항에 마중 나온 은발의 신사가 두꺼운 손을 내밀며 나에게 건네었던 첫 인삿말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안녕하세요 최 상, 일본 정부가 싫어하는 영화만 배급하는 작은 영화사 우즈마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코바야시라고 합니다.”      


1970년대에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연극부에서 연극을 했다는 그에게서 나는 이준익 감독님의 눈빛과 비슷한 힘을 보았다. 뭐 하나 꽂히면 남들 눈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직진할 것 같은 그 눈빛. 코바야시 상은 <박열> 이전에도 한국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본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제주 4.3 사건 피해자를 그린 영화 <지슬>과 영화 <크로싱>을 배급했다. 그리고 세 번째 한국 영화로 <박열>을 택한 후, 공동배급사와 함께 제목을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로 바꾼 뒤 포스터를 새로 제작하고, 팸플릿을 만들고,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나를 초대해 스물네 명의 기자, 평론가와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산시로 상, 포스터 좀 날라주세요!”

“산시로 상, 택시 좀 잡아줘요!”     


코바야시 상의 회사 직원들은  ‘산시로 상’이라고 그의 이름을 정겹게 부르며 알뜰하게 일을 시켰다. 직원들에게 지시를 받는 영화사 대표라니. "하이~하이~" 하며 택시도 잡아 주고, 직원들의 양손에 들린 무거운 포스터 더미를 낚아 채며 "요이쇼 (으랏차)" 하고 짐을 들어주는 사람 좋은 은발의 아저씨. 직원들이 자신보다 일을 훨씬 잘 한다며, 직원들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너털웃음을 짓는 그는 내가 아는 어느 회사의 대표보다도 빛이 났다.


 그는 자꾸만 자신의 회사가 “작은 영화사” “작은 영화만 배급하는 영화사” “우익들이 싫어하는 영화사” 라며 농담을 하고,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과 기세는 분명히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서, 당신이 배급하는 영화가 어떤 영환데요?” 라고 묻고 싶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 카리스마는 그의 용기 저변에 깔린 겸손함, 근면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를 향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정오의 햇살이 도쿄역 플랫폼에 미끄러지며,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흩어지는 먼지 바람이 공중에 휘감아 돈다. 코트 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에끼벤(기차에서 먹는 도시락)을 하나라도 더 팔고자 목소리를 높이며 땀을 닦는 점주들. 편의점 유리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 그 소리 사이로 물씬 나는 백엔짜리 커피와 호빵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도쿄역의 모든 빛과 냄새와 바람들 속에서 잠시동안 나는 멍해진다.

갑자기 조금 긴장이 되는 듯 하다.

지금쯤이면, 시부야의 극장에서 관객들이 <박열>을 보기 시작했겠지. 어떤 얼굴들로 보고 있을까? 사람들은 팝콘을 먹으면서 볼까? 나는 과연 어떤 얼굴로 무대에 오르면 될까? 웃어도 될까? 일본 관객들에게 나는 뭐라고 인사를 하면 좋을까.


"최 상!"


멀찍이서 먼저 택시를 잡고자 길모퉁이에 잠시 짐을 내려 놓은 코바야시 상이 나를 부른다. 나는 잠시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온다. 서둘러 나오는 나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천천히 오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한 손으로 품에서 항상 태우시는 담배를 꺼낸다.


"만석입니다. 오늘 도쿄, 그리고 나고야 극장도요."


코바야시상은 마치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고는, 씨익 웃으신다. 활짝 밝아지는 나의 얼굴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씨익 웃을때 잡히는 눈가의 주름을 보니,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내가 도쿄에 왔구나.

내가 도쿄 관객들을 만나러 왔구나.


100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처음 만났던  도시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해가 가기 전, 올해 배우로서 나에게 있었던 가장 기쁜 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영화 <박열> 혹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일본 무대인사 기록은 part 2에 계속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