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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ug 23. 2021

화이트 마사이(영화)

실화? 그건 영화에 없다. 그렇게 영화는 현실성을 갖춘다.

영화를 보면서 배우 그 자체에 매료된 경험을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과연 내가 화이트 마사이 비평글을 쓸 수 있을까?'이다. 어떤 식으로 글을 진행해야 될지 감도 안 잡힌다. 그럼에도 이렇게 끄적이는 데는 순전히 리말리안 역을 맡은 재키 이도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그의 우아한 몸짓, 환한 미소, 깊은 눈망울에 나는 반했다. 이딴 정신상태로 어떤 허접한 글이 나올지 궁금하다. 일단 존나게 써보자.

화이트 마사이는 실화를 각색한 영화인데 나는 이런 식의 영화를 어떻게 비평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결론은 '아이씨 몰라' 였으며 그런 영화를 비평하기를 사실상 포기해 왔다. 하지만 재키 이도에게 반한 지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비평하는 나만의 태도를 정해야만 한다.

실화 영화는 마케팅 단계에서부터 '실화'인 점을 매우 강조한다. 이는 마케팅 전략? 아니 전략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케팅 담당자라면 당연하게 취해야 할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있었던 일' 이것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것에 왜 끌리는 것일까?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상 서로 간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거짓에 대한 본능적 거부 때문일까? 진실이란 변하지 않는다는 그 매력적 특성에 대한 호의인 것일까? 그렇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저 같은 이유는 적어도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27년이란 짧은 인생일지라도 충분히 경험한다. 내가 거짓이라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는 진실이라 생각한다는 그 끔찍한 경험을 말이다. 그 같은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겪게 된다면 '진실 혹은 거짓' 이란 개념은 무지막지하게 흔들리게 된다. 고로 나에겐 죽음을 제외하면 진실이란 없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충분히 회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실은 언제나 육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보드라운 손길, 그 사람의 까칠한 발바닥은 죽음을 향해가기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저것에 왜 끌리는 것인가? 답하기 위해서 먼저 체험과 경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체험을 일시적 경험이라 생각한다면 체험이란 경험에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체험을 반복되지 않을 경험이라 한다면 체험은 경험을 부정하는 개념이 된다.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 것에는 후자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명백히 경험보다 체험을 우선시한다. 신제품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위풍당당해진다. 신제품의 마케팅 전략은 언제나 오래된 것,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이다. 이 같은 부정에 동의한 순간 자본주의는 꽃을 피운다.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삶의 대부분이 체험으로 엮여있지 않은가? 두 번 이상 보지 않을 영화, 두 번 이상 훑지 않을 책, 매판 달라지는 게임의 양상, 처음 들었을 때만 못한 음악이 주는 흥분, 찌를 던질 때마다 어떤 물고기가 걸려올까 하는 설렘, 빠르게 급변하는 차창 밖 풍경 등 자신의 자유로움을 흠껏 만끽하는 이 같은 오락행위를 통해 우리는 생동감 즉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생동감을 주지 않는 경험 따위 사실상 귀찮고 어쩔 수 없는 것이며 하찮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양이 아니라 미칠듯한 생동감을 얼마나 느꼈는가'라고 말한 니체는 정말이지 옳다. 영화 역시 경험보다는 체험에 가깝다. 반복될 것, 익히 알고 있는 것, 어쩔 수 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지루한 것들을 컷, 컷, 컷 하며 편집하는 영화의 특성은 확실히 경험을 부정한다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화 영화란 단어가 섹시한 것이다. 실화에는 필연적으로 우리들이 지겨워하는 경험이 담겨있다. 이것들을 생략하고 건너뛰고 하며 체험으로 만들어버리는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확실히 매력적인 것이다. 못생긴 것이 잘생겨지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주는 경이로움을 다루는 뷰티 관련 콘텐츠와 같은 맥락의 즐거움, 그것이 실화 영화다.

그렇게에 마케팅 전략에서 강조되는 실화는 동시에 부정되는 것이다. 실화는 그렇게 제물로서 바쳐진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실화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못된다. 혹자들은 말한다. 해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실명을 거론하는가 하면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식의 짧은 코멘트로 당당함을 어필하는 반면 한국 영화는 소변 마려운 개처럼 가명을 쓰거나 실화를 바탕으로 어쩌고 저쩌고 허구가 있느니 마느니 낑낑되는 모습이 영 보기 안 좋다고,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옳은 것이 아닐까? 물론 한국 영화판이 실화를 다룰 때 낑낑되는 것에는 법적 소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임이 확실하다. 누구 하나 영화가 실화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겸손 하에 낑낑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게 낑낑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실화'라는 담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경험보다 체험이 우선시 되는 사회 그러고 그 흐름에 맞춰 탄생한 오락물이 영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산업발전, 과도한 이농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집중, 노동자란 개념에 대한 처우 등 이 같은 흐름 속에 탄생했다. 첫 영화가 괜히 열차의 움직임과 바글거리는 사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한 시점부터 경험은 등한시되고 체험이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반복적 노동에 지친 노동자는 그렇게 영화관으로 향한다. 경험에는 노동이 있고 체험에는 노동이 없다. 분업과 동시에 낮아지는 노동가치, 그 낮은 가치를 즐기기 위해 영화관을 가는 이는 없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새로움에 대한 갈망 즉 체험을 하기 위해 영화관으로 향한다. 그러니 영화에는 경험이 없으며 실화도 없는 것이다. 노동을 다루는 영화는 있어도 노동을 담은 영화는 없다. 인생을 다루는 영화는 있어도 인생을 담은 영화는 없다. 더 나아가 영화로 인생을 배웠다고 나불대는 것은 성경책 하나로 인생을 통달한 것 같이 구는 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실화 영화를 비평하는 나의 태도를 말할 수 있겠다. 실화? 좇도 신경 안 쓴다. 어떤 영화든 내가 살아온 인생의 관점에서 보이는 부분을 비평할 뿐이다. 그렇게에 한 가지 영화에 수없이 많은 비평가가 들러붙을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화이트 마사이, 이 영화를 다뤄보자. 현대 문명인과 원시부족인 과의 사랑을 다룬 영화 화이트 마사이, 이 정도로도 충분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원시 부족을 미개하게 여겨 희극적으로 조롱을 하거나, 계몽시켜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여 온갖 폭압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영화는 훌륭한 위엄을 뽐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화이트 마사이에는 앞서 말한 몰상식한 태도는 없었다. 오히려 감독은 마사이족이 가지고 있는 강인한 퍼포먼스들에 매료된 모습을 보인다. 리말리안(재키 이도)의 아우라에 매료된 카롤라(니나 호스)는 리말리안이 자신을 선택해주실 희망 하며 기다린다. 흥분과 낙담을 반복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카롤라.... 이 이야기의 흐름은 재미지게도 리말리안을 만나겠다는 열의에 가득 찬 카롤라의 행위가 펼쳐진 뒤 곧바로 이어진다. 카롤라는 스위스로 돌아가자는 남자 친구의 권유를 당차게 거절한다. "너는 그 남자와의 하룻밤만을 원하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남자 친구의 찌질함이 그녀의 당찬 행위를 축복해준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낯섦 그 이상의 환경으로 향하는 카롤라는 버스 안에서 낯선 이들의 환대를 받는다. 이렇게 감독은 그녀의 행위는 용기 있는 것이며 누구나 축복해 줄 수밖에 없는 것임을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하지만 카롤라의 적극적 포퍼먼스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곳으로 간다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한다. 감독은 이 같은 현실감을 놓치지 않는다. 리말리안은 카롤라가 많은 것을 희생하며 자신에 온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기다리게 한다. 몇 날 며칠.... 그리고 리말리안은 태연하게 그녀를 데리러 온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흥분에 찬 행위가 순식간에 그 여자를 데려온다로 차분하게 변해버린다. 이 같은 흐름은 관객에게 적잖은 혼란을 준다. 관객에게 카롤라와 리말리안의 만남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적 재미를 고려했을 때 그 둘의 만남을 폭발적이게 연출하는 것이 더 큰 재미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그러한 일반적 선택을 회피한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에는 마사이족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다. 현대문명 여성이 원시부족 남성을 만난다는 행위는 기이한 것이며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이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이 남성에게 큰 시혜를 베푸는 것, 큰 손해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같은 생각을 부정한다. 리말리안이 자신을 데려오기를 기다리는 카롤라의 초조함, 불안함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전시하는 동안 마사이족인 리말리안의 위상이 높아져간다. 그렇게 두 문화의 균형이 맞춰진다. 한술 더 떠 감독은 카롤라를 데려간 리말리안이 형편없는 섹스를 선사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차분히 변한 분위기를 차갑게 식혀버린다. 그렇게 둘의 사랑에 환상이 사라진다. 사라진 환상에는 사랑이 가진 폭발적 힘도 있지만 문화 간의 우월성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감독의 태도는 실로 고상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만남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쉬웠다면 아직도 인종차별 문제가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인종차별은 재미지기도 하기에 중국이라는 새로운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추한 꼴들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행태는 훗날 비판받을 것이다. 현재 중국을 비하하는 그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재밌으니깐, 그것이 유행이니깐 하는 것이다. 마사이족인과 스위스인의 만남에서 흥미가 풍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실제적 문제는 중국인을 비하하는데 무슨 타당한 이유가 있듯이 거들먹거리는 것들, 그들이 가장 꼴통이다. 어쨌든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는 화이트 마사이에도 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의 차이를 부각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 점을 언급하기에 앞서 '대화'라는 것을 다룰 필요가 있다.

대화에 관련하여 널리 쓰이는 인용구 두 개를 대보자. '대화는 보통 지 할말만 한다', '대화의 기본은 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 동의한다. 어떤 이와 대화를 나눈 뒤 당신에게 그 대화를 복귀할 시간이 있었던 적이 있는가? 올바른 대화를 나눴다면 당신은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를 깊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흠... 이 말은 꽤나 멋있었지', '으.... 그 말은 받아들여졌을까?' 하고 말이다. 반면에 당신이 상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곱씹어진다면 당신이 했던 대화는 상호 간의 소통이기보다 일방적 대화였을 것이다. 상대와 대화를 하기 싫음에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거나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배워야겠다 혹은 얻어야겠다는 생각 하에 이루어진 일종의 폭력과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대화는 지 할말만 하는 것이 된다. 대화의 핵심은 듣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대에게 부딪히고 싶다는 열망 하에 벌어지는 말이 대화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뱉은 말은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감정이나 상황을 2차적으로 보살피게 된다. 훌륭한 대화의 일차적 효과는 자기 객관화이며 상대에 대한 배려는 2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면 상대가 했던 말을 곱씹게 되는 대화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곱씹는 행위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타격 혹은 어떤 보상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르고 순화하고 배척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화는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임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대화의 기본은 들어주는 것이다'라는 인용구에도 동의한다. 다만 그 같은 대화가 현 사회에서 얼마큼 행해지고 이루어지냐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는 것에 요상한 조건을 단다. 공통점! 적어도 같은 영화, 같은 책, 같은 음악, 정도는 공유해야 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공통점이 없을 시에는 대화가 성립조차 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상대와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에 안심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존재하는 공통점을 억지로 보지 않는 듯 보인다. 낯선 이가 대화를 거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대화를 요구하는 낯선 이의 눈빛은 경계 섞인 눈들에 의해 갈 곳을 잃어간다. 그렇게 공동체 정신은 말살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의 기본은 확실히 들어주는 것이 된다. 공통점이 없어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불구하다. 먼저 들어나 봐라 그 과정에서 공통점은 생겨난다. 적어도 같은 영화 한 편을 봐야지만 대화가 성립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대화의 기본이 들어주는 것이 되었는지......

자 이 같은 대화의 전제하에 화이트 마사이를 보자 감독은 두 문화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이 주 스토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다소 특별함을 부각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실로 이 영화는 그렇게 이어진다. 카롤라는 의외로 쉽게 마사이족에 받아들여진다. 다소 귀찮은 법적 절차가 존재했음에도 리말리안이 마사이족 복장을 벗어던지고, 말라리아 병에 걸린 카롤라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해결된다. 둘의 사랑은 문화 차이에 의해 다소 특별할 뿐 사랑은 행해진다. 카롤라도 리말리안도 조금씩 변화하는 유연성을 보인다. 서로의 유연함에 사랑은 지속되고 증폭된다. 특별하지 않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의 사랑도 그렇게 행해지니 말이다. 이곳에서 여자들은 옷을 벗지 않는다는 리말리안의 문화, 그리고 머리를 감으며 굳이 샴푸를 사용하는 카롤라의 문화 그 사이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사랑을 느끼는 식의 씬 배치는 두 문화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곧 상쇄되는 것이라는 훈트게르부르스 감독의 철학이 담겨있다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둘의 사랑은 특별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둘의 결별은 특별한 것이 된다. 아니 특별하게 만들어진다. 둘의 사이가 멀어지는 이유는 리말리안의 의심과 카롤라의 무심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보통의 사랑과 다름이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카메라의 시선이 리말리안의 의심만을 부각하여 특별해진다. 리말리안의 의심은 커지고 카롤라의 따귀는 붉어지며 리말리안의 우아한 머리는 잘린다. 카롤라는 자신의 행위를 돌보지 못하고 리말리안은 일방적으로 카롤라의 행위에 자극받는다. 그 자극의 결과가 의심이 되어 카롤라를 상처 입힌다. 그렇게 둘은 올바른 대화를 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문화 차이가 부각된다. 이 영화는 실화를 각색한 영화이다. 두 인물의 헤어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감독은 정해진 이별에 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문화 차이가 된다. 그렇기에 감독은 둘의 사이가 틀어지는 부분에서 대화를 삭제해버린다. 어느 순간 리말리안만이 일방적으로 카롤라에 의해 변해간다. 그 같은 상황을 야기시키는 문화 차이는 어설프게 던져졌던 떡밥, "눈을 보면 안 돼"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카롤라로 끝을 맺는다. 버스 안에서 자신의 아이를 보듬으며 흘리는 카롤라의 눈물, 이것은 명백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흘리는 안도의 눈물이다. 그 이미지를 감독이 만든 것이다. 그렇게 리말리안은 순식간에 미지의 공포를 선사하는 알고 싶지 않은 인물이 된다. 리말리안은 매력적이었으며 감독은 문화 차이를 상쇄해왔다. 이것이 영화 후반에 뒤집어진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변화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이미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꽃피울 때 왕성한 대화가 이루어지듯 사랑이 시들 때 역시 왕성한 대화가 오간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들 때의 대화를 제거한 것이다. 영화 후반부터 카롤라도 리말리안도 자신의 행위를 객관화하는 장면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의도적 어색함에 문화 차이가 크게 부각된다.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삶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후반  훈트게르부르스 감독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어떤가? 이렇게 화이트 마사이에 대한 나의 평론은 끝이 났다. 여러분아, 그대들아, 당신들은 나의 이 같은 평이 마음에 드는가? 내가 쓴 글이니 나는 마음에 들어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이 나의 이 같은 평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건 영화를 너무 재미없게 보는 행위이다. 그러니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실화? 좆도 신경 안 써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영화가 실화임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반대였다면 눈빛 하나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객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훈트게르부르스 감독의 감탄스러운 씬 구성과 마사이족의 폭발적 포퍼먼스를 담아낸 장면들을 언급하며 유쾌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실화? 좆도 신경 써버렸기 때문이다. 부디 영화에서 실화는 좆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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