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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Feb 20. 2022

로마(영화)

평론가 그게 뭔데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확실히 매력적인 영화다. 한 시대의 풍경, 분위기를 현재의 카메라에 담아낸다는 시도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린 스포츠 경기를 보며 스코어나 경기의 승패에 열광하는 동시에 그 같은 경기를 보여주기 위한 선수들의 숨은 노력에 감동받기도 한다. 이와 같이 로마는 제작 단계에서의 세심함, 치밀함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단 한 숏도 카메라 프레임의 한계를 이용한 꾀를 부리지 않는다. 의사 아버지, 바람 난 아버지인 토니오(페르난도 그레디아가)의 등장신을 제외하면 카메라는 긴 호흡의 패닝, 트랙 그리고 롱테이크를 구사한다. 쿠아론의 카메라는 말한다. '나는 1968년 10월 2일 언저리인 시대를 현재로 복원하였다' 시대를 끌어오기 위한 복원가의 집념과 열정을 바라보는 건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 로마는 왜 흑백영화인 것인가? 과거 시대임을 말하기 위한 선택인가? 그럴 필요 없다. 흑백이 아니더라도 쿠아론이 담아낸 장면은 확실히 1968년이다. 놀라울 만큼 1968년인 것을 흑백 기법을 사용하는 건 오히려 자신의 노력을 덮는 행위이다. 흑백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효과를 위해서인가? 로마는 우울한 현실, 그것에 대한 담담한 인내가 담아져 있지만 결국 쿠아론 답게 결말지어진다.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를 통해 보여 준 후대에 대한 밝은 믿음 같은 낙천성을 로마에서도 보여준다. 감독 특유의 낙천성이 깨지지 않은 이상 위의 이유는 굳이 흑백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부끄러움, 칙칙한 옷을 입는 것은 자신의 우울함을 뽐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로마의 흑백에서 감독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로마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여기서 로마를 클레오에 대한 영화라 본다면 이 영화는 재수 없고 비겁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레오란 캐릭터는 충분히 입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주구장창 거리를 두고 훑을 뿐이다. 그녀의 솔직함, 음습한 감정 등을 묘사하기 위한 카메라는 없다. 더 까놓고 말하자면 그녀의 직업이 하녀인 것에는 그 시대의 특수성을 말해줄 뿐 하녀의 비참함, 기쁨, 시사성 따윈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한 인물의 두려움, 희망 등을 집요하게 담아낸 영화인 그래비티를 만든 감독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을 거라 본다. 사실상 로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그 시대를 복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시대의 차, 찻잔, 문, 잡상인, 문화, 습관 등이 카메라에 담겨있듯 인물 역시 같은 이유로 담겼다 볼 수 있다. 쿠아론의 재수 없음에 힘입어 나도 재수 없게 말하면 클레오와 페르민(호르케 안토니오 게레로)의 비루한 사랑,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위선, 틀라텔롤학살의 비극은 영화적 구색을 갖추기 위한 장치로서 쓰였을 뿐이다. 시대의 불안 혹은 부조리는 냉철한 눈만으로 때론 충분하다. 허나 개인을 바라볼 때는 몇 가지의 눈이 더 필요하며 그것 역시 불충분하다. 이번 영화 한에서 쿠아론의 눈은 하나였으며 그 온도가 가끔 올라갈 뿐이다. 그 결과 1968년의 향수를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쿠아론의 긴 호흡의 패닝, 트랙 그리고 롱테이크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것들, 주관이 드러나야 하는 것들에 제 3자의 시선 즉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는 비겁함과 체념을 내보인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렇게 쿠아론은 흑백을 선택해 자신의 영화가 다채로운 영화가 아님을 고백한다. 쿠아론의 흑백은 겸손이며 포기 못한 인간애다.

딱 여기까지다. 로마는 이 정도의 평이 적당하다. 사실 로마를 보고 평론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침묵이 답이다. 평론 역시 하나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나에겐 클레오의 삶을 보며 페미니즘으로 연결시키거나 페르민의 순수함과 그에 덧붙은 악을 서술하거나, 틀라텔롤코 학살의 의의, 68 혁명이 던진 메시지 따위를 적어내는 타 평론가의 작태에 역겨움을 느낀다. 쿠아론이 담아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떠들어대며 자신의 지식을 뽐낼 뿐이다. 그 결과 쿠아론의 우아함을 칭송하는 약간의 글과 함께 쿠아론은 드러나지 않는다. 클레오와 마찬가지로 쿠아론은 평론가에게 도구적으로 이용된다.

쿠아론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복원하고 반추했을 뿐이다. 개인의 경험에서 파생되는 감정, 주관, 자아 따위를 카메라를 이용해 객관화시킨 작업의 결과물이 로마이다. 있었던 것들의 정리, 이것은 평론가의 역할이지 영화감독이 수행하기엔 영화란 매체가 아깝다. 평론가가 수행할 것을 영화감독이 해대니 평론가는 침묵이 답이란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보여준다는 행위의 차이는 확실하다. 그 차이는 생동감에서 시작해 죽은 것, 살아있는 것으로 발전해 표현해낼 수 있는 것에 차이를 두며 수용자에게 선사하는 재미의 종류 역시 달라진다. 개인적인 것들을 객관화시켜 세상과 연결되려는 로마에서 보여준 쿠아론의 시도는 분명 흥미로우며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죽은 것들에 대한 나열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생동감을 포기한 영화는 보기엔 편할 수 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세상과의 연결을 단념한 인상을 준다. 이렇듯 쿠아론이 세상에 무언가 던지고자 로마를 만들었다면 그 시도는 실패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보여주는 것을 예술 행위로 선택한 영화의 숙명이다. 반면 쿠아론의 시도가 글로써 행해지면 세상과 연결되려는 강한 욕망을 드러낸다. 앞으로의 글은 이것에 대한 역설이지 로마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의 역할에 대해서, 론가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설파해보련다. 나에게 로마는 평론가들의 수축된 어깨를 보여주는 동시에 생동감을 포기한 즉 변화를 포기한 영화의 단조로움을 보여준다. 뭐... 후대에 대한 낙관으로 영화를 마무리해 온 감독의 낙관성을 고려해 봤을 때 현실의 고정성을 아름답게 꾸미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위화감이 현실화됐다는 점에서 나에게 마냥 단조롭지만은 않았다. 로마의 포스터인 클레오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그 안정적 삼각형 구도를 표현한듯한 사진은 아름다움과 함께 답답하다.

객관의 사전적 의미를 읊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드러내는 것, 작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 과연 평론 글은 위에서 언급한 객관과 어느 정도의 연결성을 가지고 있을까? 혹자는 평론가에게 객관적 분석을 요구한다. 또한 평론가의 덕목 중 하나가 객관성이라 한다. 그들의 요구는 평론가와 작품 사이에 상업적 연관이 없을 것을 넘어선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구분할 기준을 세워주길 바라며 동시에  기준을 검열한다. 언뜻 건강해 보이는 이 같은 상호 견제는 '객관적'으로 개명한 현시대의 사회통념을 구축시킨다. 의미 없다/교훈적이다 에서 저급하다/고급스럽다 그리고 구리다/쿨하다 로 사회통념은 세부적인 사항들의 치열한 논박을 거쳐 기준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유동적인 면도 보인다. 쉽사리 통제되지 않는 사유라는 힘 아래 기준은 세워지고 다시 무너진다. 이 같은 흐름을 경직되었다 보는 것은 정신병자의 망상으로 치부해도 될 것이다. 그 정신병자가 바로 나다.

평가 기준의 끊임없는 변화 즉 사회통념이 무너지는 어떤 특정한 시기의 건강함도 곧바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일에 부역하게 된다. 이 같은 긴 역사를 인지한 자들은 여러 기준들에 대한 용을 보이며 입을 다물게 된다. 결국 평가한다는 행위는 역사를 모르는 코흘리개들의 어설픈 논쟁이 된다. 코흘리개도 결국 어른이 되고 또 다른 코흘리개들에게 뜯기게 되어있다. 결국 산업시대의 도래 이후 과중화된 노동에 대한 문제를 접더라도 예술은 젊은 이들의 문화가 된다. 예술은 세대, 인종, 성별, 등 모든 구별 가능한 것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예술가들이 가장 극렬히 애통해하는 자본주의적 속성 중 하나다. 특정한 수의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 예술은 유지된다. 배고프다 울어대는 수많은 요람 속 아기들은 젖 모양만 갖추면 그만이다. 결국 예술이 삶의 필수요소라 떠들어대는 자들의 이유는 그저 심심해서로 귀결된다. 심심해서 하는 것들에 평가 기준 따윈 의미 없으니 모든 취향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게으른 자들의, 무책임한 자들의 위험한 발언에 힘이 붙는다. 코흘리개들의 노발대발은 있겠지만 조만간 둥그러지겠지라는 사회통념의 믿음 혹은 각오 하에 코흘리개의 콧물은 계속 흐른다.

작품에 대한 평가 기준은 분명 존재해야 하며 그 기준이 모호하지 않을수록 좋다. 다만 그 기준이 객관성을 토대로 세워지면 안 된다. 현재 평론가라 인정받은 자는 '저 사람은 객관적이네'라는 다수의 인정과 함께한다. 그 결과 평론가는 대중의 대표 노릇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평론가의 긴 글은 읽히지 않는 동시에 쓰지도 않는다. 별과 함께 첨부되는 쓰레기가 평론가의 주된 업무로 변한다. 객관적이라는 아우라만 뽐내면 그만이다. 가끔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자 하겠지만 쓰는 글이란 고작 제작 당시의 에피소드나 영화 관계자의 인터뷰나 받아 적을 뿐이다. 평론가만큼 평가에 대한 기능이 부실한 자는 드물다. 이것은 지가 객관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평론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객관성을 대표하는 무엇을 요구하는 이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현재의 우리는 몇 번의 계몽을 거쳐 신을 죽였다. 계몽은 개인적인 것, 주관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된다. 허나 그 끝은 자아의 순종을 요구한다. 신에게 바치는 맹목적 희생은 시스템에 대한 순응으로 치환된다. 이 알싸함의 반복에서 계몽주의자들의 민낯이 드러났으며 현재의 계몽주의자는 간신히 꼰대라 칭송받으며 연명하게 되었다. 허나 계몽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휘두르는 칼이 문자에서 숫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알싸함은 초기에 달며 시간이 지나며 시큼해지듯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시큼해지기 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신은 대체됐을 뿐이다.

평가 기능을 상실한 즉 영화 제작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나 감독의 인터뷰에서 따온 말을 인용하는 글, 진정 당신들은 그 따위 시시콜콜한 것을 알고 싶어 평론 글을 적이는가? 나의 글을 읽게 된 것인가? 아닐 것이다. 당신은 영화를 보고 생겼던 그 의뭉스런 감정들에 확신을 새기고 싶다. 예술을 즐기고 난 뒤의 공감이라는 2차적 흥분을 즐기고 싶다. 그 작품의 훌륭함 혹은 추악함이 형체가 있는 무엇으로 남겨지기를 바란다. 덧붙여 자신의 감각을 세상이란 곳에 부딪히고 싶다. 그렇게 당신의 주관이 생겨난다. 그 멋진 경험을 하기에 현재의 평론 문화는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예술을 통해 생긴 에너지는 주체적인 것을 정립하기보다 객관이란 큰 흐름에 묻혀 버린다. 객관적이라 인정받은 평론가가 한마디 한다. '오... 이 영화는 미장센이 뛰어납니다.' 우리는 객관이란 권위를 그에게 주었으니 이렇게 반응한다. '아.. 그렇구나' 그렇게 주관은 사라진다.

예술을 수치화될 수 있는 것들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객관은 평론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평론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가 객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의 주관이 확고하기 때문에 그를 바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든 취향은 인정돼야 하는가? 당신은 두려울 수 있다. 객관적인 무엇이 없다면 저 추잡한 취향까지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자신의 취미가 더욱 훌륭함을 증명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진절머리가 난다. 어떤 작품에 불평을 늘어놓는 이에게 '어차피 개인 취향인데 뭘 그리 열냄?' 따위의 냉소를 보내는 행위에 말이다. 좋고 나쁘고를 평할 정도의 심지도 없는 것이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척하는 것에 역겨움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들의 뒤통수를 후리기 위해 객관이란 것을 끌어들이는 행위는 이해는 돼도 기묘하다. 자신이 가진 취미를 드러내려 했던 이 가 어느새 그 취미를 제 3자에게 맡겨버리는 꼴이니 말이다. 꼴 보기 싫은 녀석을 후리기 위해 아는 형을 동원했다 해도 당신의 주먹으로 후려야 한다. 아는 형이 그 녀석을 후리는 것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만큼 당신은 비겁하다. 모든 취미는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인정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인정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이가 가진 취미는 인정받지 못하지 않는가 허나 그 이유가 사회의 보편적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겁하다. 그들의 취미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그 취미가 매우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함과 약함에 대한 원초적 본능만을 추구하는 것이며 얼마나 약한가에 결정되는 자신의 강함을 즐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저 작고 연약함 거기에 순종성만을 좋아하는 이들의 취향에 다양한 개체가 생길 리 없다. 그 빈약함에 그들은 자신의 취미를 갈고닦을 수 없기에 그러지 못한다. 그저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몰두하며 또 즐길 뿐이다.

평론가란 존재의 탄생이 그가 취미의 영역인 예술에서 객관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평론가란 예술을 접한 후 그 개인적 좋고 나쁨에 대해 반추할 정도의 열정이 생긴 순간 탄생한다. 내가 이걸 왜 좋아하지? 혹은 이것은 나에게 왜 역겨운 것이지? 이 같은 반추는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이며 동시에 그것을 설명하고픈 열망을 내포한다. 나에게 설명되는 순간 그것은 제 3자에게도 가능해진다. 여기서 개인은 세계로 연결된다. 그 경험을 글로 표현하는 자가 가시화된 평론가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 취향이 반추되어 설명되는 과정에서 객관화 즉 제삼자의 시선이 이용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주관이 정립된 미라 할 수 있다. 평론의 재미는 객관적 정보를 만들어내는 곳에 있지 다. 하나의 주관이 생기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의 취미가 객관적이라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주관을 정립하기까지 그가 쏟아낸 노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취미는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 가능성만이 열려있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온갖 추잡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게 된다. 그 혼돈은 충분히 즐길만하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 같은 즐거움을 객관이란 틀에 쳐박는 나태한 당신들의 손이 나는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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