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어렴풋이 느꼈다. 더 이상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구나. 몇 년 전 우연찮게 내 곁에 평론가 하나 있었다. 그는 스페이스바를 눌러되며 숏, 씬, 시퀀스를 구분했고 멈춘 시간 동안 글을 끄적였다. 자신의 몸이 어디 뉘었는지 잊을 정도로 영화에 몰입해 봤던 사람은 안다. 분석을 위한 영화 관람은 그저 고통일 뿐,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일 뿐, 그 애잔한 몸짓을 배우기 싫어 나는 나만의 규칙을 세웠다. 비평글을 쓰기 위한 영화일지라도 딱 한 번만 눈에 담기로, 영화를 본 뒤 자연스레 내게 흔적을 남긴 소재로만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지금까지의 글은 그렇게 쓰였고 최근 들어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그 규칙이 자꾸만 깨졌기 때문이다. 난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어졌고 글을 쓰기 위해 영화의 연결성을 파괴시켰다. 애써 글을 완성했을 때 이면지로도 부끄러운 쓰레기가... 상태는 최악이다.
얼마만인가! 그리웠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끝의 기적을 봤고 감독의 의도대로 1시간 30분이 흘렀다. 정확히! 화장실을 향했던 머리가 어느새 문짝에 향해 있었다. 드디어 비평글을 쓸 수 있겠구나 기뻐하며 내 머릿속에서 영화가 복귀되었다. 다시 한번 상태는 최악이다.
결론부터 적자면 손끝의 기적은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한 영화다.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연출을 통해 느껴 줬으면 하는 감각, 남기고 싶은 이미지 등의 욕심보다 장 피에르 아메리스 감독은 관객을 몰입시키는데 더 집중한다. 영화의 시작은 마리(아리아나 리부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역시나 그녀의 등장에서 아메리스 감독은 그녀가 시청각 장애임을 알려준다. 흥미로운 점은 첫 씬이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잘 따르며 부녀가 수도원으로 향함을 같이 담는다. 시청각 장애를 가진 소녀가 수녀를 만나 세상과 소통한다는 스토리의 영화가 이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썩 그렇지만은 않다. 단순 시작 부분의 흥미를 목적에 뒀다면 마리와 함께 그녀의 장애의 불행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비극에 환장하는 예술의 특성상 마리가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는 것보다 고통에 허덕이는 마리가 더 흥미로운 건 당연하다. 기승전결이란 전통을 생각한다면 수도원에서 시작해 스토리의 키 포인트인 마리가 등장하는 순서로 진행됐어야 한다. 영화의 주제인 훌륭한 스승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다면 마거리트 수녀(이자벨 카레)의 등장으로 시작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그녀가 교육에 대한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는 정보나 그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보여줘도 좋다. 이렇게 시작해야 그녀의 죽음이 동시에 스토리의 마무리라는 흐름에 힘이 실리며 마거리트의 잔상이 깊게 남을 것이다. 이렇듯 아메리스 감독의 선택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스 감독이 선택한 첫 씬은 마리의 등장보다는 스토리의 템포를 올리는데 목적이 있다. 관객은 마리에서, 마거리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마리가 수녀원에 맡겨진다는 사건에 던져진다. 시작부터 템포는 올려진다. 그렇기에 마리가 수녀원에 맡겨져야 하는 이유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말이오'라는 대사에 함축되고 마거리트의 건강이 좋지 못함은 '오늘 몸 상태 괜찮나요'라는 대사에 함축된다. 그리고 곧바로 마거리트와 마리의 손끝이 닿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더욱 거칠게 쓰자면 첫 씬에서 아메리스 감독은 마거리트와 마리와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준다. 둘의 관계에 마리의 부모가 자신의 딸을 아낀다는 설정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렇기에 첫 씬에서 적당히 허나 함축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스토리의 템포를 올려 관객의 몰입을 자아내는 연출은 그렇게 놀라운 방식은 아니다. 대다수의 감독이 그 같은 효과를 염두에 두니 말이다. 놀라운 점은 아메리스 감독은 생략이 아닌 함축 한다는 점이다. 시청각 장애를 키우는 부모의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서로를 연결하는 혁대로 함축된다. 마거리트의 특출 난 고집이 앙증맞게 치켜드는 검지로 함축된다. 마리의 장애가 주는 소외감이 아이들의 악의 섞인 호기심으로 뭐... 조금 어설프게 함축된다. 마거리트의 무모함을 비난하는 주변이들, 좌절에 빠지는 마거리트 등의 감정 역시 함축된다. 이렇게 마거리트와 마리와의 관계에 있을법한 사건과 감정을 아메리스 감독은 생략이 아니라 함축한다. 이 같은 연출이 감독의 지나친 욕심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몇몇 장면은 어설픔을 드러내 차라리 생략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허나 아메리스 감독이 보여준 함축은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해 선택한 빠른 템포에 풍성함을 더해 준다. 그 점이 아쉬움을 충분히 덮는다. 마리가족의 감동적 재회에 곧바로 마거리트의 죽음에 대한 스토리를 담아내는 아메리스의 선택이 결코 조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나는 이렇게 손끝의 기적에 몰입당했다. 휘몰아치는 아메리스 감독의 박자감에 정직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다시 한번 나는 몰입한 게 아니라 당했다.
대중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분 짓는 행위는 어리석다고들 한다. 재밌는 지점은 대다수가 어리석다고 동의하는 현재도 어리석다는 비난이 횡행한다 이쯤 되면 구분 짓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꿍얼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렇다. 대중영화, 예술영화 구분 짓지 말자 말하는 이들은 어차피 다 같은 산업이라 말한다. 그 같은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울컥거린다. 확실히 영화는 산업이다. 돈 넣고 돈 버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산업적 측면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된 후 영화에 대한 가치가 평가된다. 이쯤 되면 영화가 내포한 예술은 가식으로 느껴진다. 돈 벌만하다는 온갖 핑계들이 난무한다. 그 과정에서 돈벌이되지 못한 가치들이 사라져 간다. 애써 몇몇 감독을 작가주의 감독이라 치켜세우며 예술 흉내를 낸다. 나 역시 작가주의라는 것에 흥분해 왔다. 이제는 서늘하게 다가온다. 표현 방식에 나름의 규칙을 세우며 그 방식의 의미를 꽃피우려 했던 운동들이 작가주의로 퉁쳐진다. 관객들이 현명하게 혹은 맹목적으로 돈을 쓰게 끔 만들어진 장르가 우글거린다. 독립영화 역시 장르로 묶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독립영화가 하나의 장르로 묶이는 것은 오히려 대우를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돈이 없어 대충 만둘 수밖에 없는, 포기된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독립영화니 말이다. 점점 산업성에 익숙해지고 있는 영화에 간신히 안타까워할 줄 아는 이들은 말한다.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라 어쩔 수 없다고 근데 정말 그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각종 전문가들의 분업들이 돈이 많이 들게끔 만든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에게 떨어지는 돈이 달콤해진 만큼 대중영화는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예술도 사라져 간다. 확실히 지금은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할 수도 없다. 예술에 전문성을 접붙이는 건 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미쳐버린 발상에 전문가들만이 미친 듯 고고해져 간다. 대중도 있고 예술도 있기에 순수성에 코박는 멍청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멍청이들은 박을 코도 없다. 브레이크를 밟아야겠다. 영화, 산업이라는 두 단어가 더 이상 같은 길을 가지 않을 때 영화는 다시 대중과 예술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멍청한 반복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영화는, 내 것이 되려는 영화는 몰입시키려는 영화와 몰입해야 하는 영화로 나누어진다. 언제나 핵심은 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