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모래 Apr 28. 2023

검정 은색 솥

타고난 무덤덤함과 억척스러움에 관하여

내가 얼마나 까탈스러운 성정을 타고 났는지.


맘 먹고 까다롭자면 나만큼 까다롭고 취향이 확고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 거다. 더구나 취향에도 정답이 있다고,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굳게 믿고 있는 사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나만의 삶의 규칙을 나열하면 책 한권은 나올 만한 사람. 그 규칙들 중에 까탈스럽게 굴지 말자, 그 한 줄이 없었다면 주위에 아주 큰 지랄병 환자로 소문났을 사람.


나는 어릴 때 봉사활동을 꽤 많이 다녔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의 의지였다. 어쩌면 내가 나쁜 놈인 걸 이미 알고 있던 부모님의 방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특히 해외로 의료봉사를 자주 다녀왔는데, 주로 내가 할 일은 통역이었지만, 오지로 나간 의료 봉사가 어디 정해진 일만 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던가. 나는 진료센터를 설치할 때는 짐꾼이었고, 진료 중에는 통역가였고, 간이 수술실을 설치하는 설비팀이기도 했고, 바이탈을 체크할 때는 인턴이기도 했고, 접수원이기도 하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생기면 경호팀이기도 했다. 나는 하기 싫은 건 하지 말자는 주의에, 방탕한 양아치였지만, 타고난 일개미이기도 했다. 이왕 시작했다면, 의료봉사때문에 (아버지에게 끌려갔든 어쨌든) 오지에 갔다면, 온 에너지를 다 쏟아서 몰입했다.


그 해외 의료봉사라는게 꽤나 재미있는데, 당연히 모든 지역에 갈 수는 없으므로 어느 한 지역에 2-3일 정도를 머무르게 된다. 그러면 하루에 적게는 백 명, 많게는 사백 명 정도의 지역 사람들이 와서 진료를 보게 된다. 당연히 한 마을 사람들은 아니고, 옆 마을에서도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의료봉사 현장은 작은 축제처럼 변한다. 조금 한가한 날에는 마을 사람들과 농구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옷과 간식거리를 나눠준다. 솜사탕 기계를 사서 솜사탕을 나눠줬을 때에는 거짓말 보태서 연대 규모의 어린이들이 찾아오곤 했다. (거짓말, 많이 보탰다.)


그러면, 당연히 무료 봉사이지만, 음식은 마을에서 십시일반으로 제공을 해 준다. 뭐, 안 해주면 방법이 없다. 배달을 시킬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팀이 전부 들어갈 식당이 근처에 있는 곳도 아니니까. 근처의 교회나 마을 회관에서 음식을 해서 다회용 플라스틱 접시에 퍼올려 준다. 음식들의 이름은 다 까먹었다. 뭔가 걸쭉하게 볶은 야채나, 뭔가 볶은 닭이나, 누구신지 모를 생선이 나왔다. 우리만 먹는 게 아니라 거기 있는 마을 사람들이 다 먹기 때문에, 음식의 양은 대개 넉넉했다. 나는 한창 자랄 나이라(그런 줄 알았는데, 거기서 더 자라지 않았다) 늘 한그릇 쯤 더 먹곤 했다.


음식은 늘 조금씩, 한국 사람이 먹기에는 곤욕스러운 맛이나 냄새가 나곤 했다. 모르는 향신료와 모르는 생선과 모르는 야채가 빚어낸 콜라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우리의 규칙이었다. 맛있게 먹을 것. 그건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준 귀한 음식이니까. 맛이야, 몇달 쯤 먹다 보면 적응이 된다. 그런데 늘 내 안의 까탈스러움을 자극했던 건 그 음식을 했던 냄비였다.


언제나, 냄비라기보다는 솥에 가까운 커다란 것에 한번에 음식을 했는데, 기묘하게도 어느 마을을 가도 그 냄비는 은색과 검정색, 투톤이었다. 디자인 요소가 아니라, 은색이었던 것이 검정 때가 탔던지, 검정색이었던 것이 은색으로 벗겨졌던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 간헐적 은색과 검정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과연 이 음식을 먹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뇌가 생기곤 했다. 그 주위에 곤충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다면 더더욱.


당연한 얘기지만, 물과 음식이 맞지 않아서 (물에서는 주로 미끈한 식감이 났다.) 탈이 나는 팀원들도 늘 있었다. 먹으면서 쇠약해지는 음식이라니. 그래도 의학적으로 음식을 못 먹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투정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히려 열정적으로 그 이름 모를 것들을 먹었다. 그러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잠시나마 공동체로 받아주었다. 헬로 헬로를 외치던 아이들은 둘째 날 아침에는 마을 어른들에게 하듯이 전통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코리안, 꼬레, 꼬레아노가 그 나라 말로 선생님, 형님, 동생이 되었다.


그렇게 먹은 이름모를 민물고기가 족히 삼백 마리요, 목구멍으로 넘어간 벌레류도 수십 마리는 너끈히 된다. (벌레는 정말 흔치 않다.) 누군가는 간염에 걸리고 누군가는 기생충에 감염되고... 그렇게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 대신 좀 더 억척스럽고 무덤덤한, 사내놈으로 자란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길러낸 내 강인함이 자랑스럽고 기뻤다. 그건 유약하고 까다로우면서 짖어대기만 엄청 하는, 성격나쁜 치와와같은 내게 좀더 깊은 뿌리를 만들어줬으니까.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음식투정을 하는 사람을 볼때 나는 어엿한 한 명의 꼰대가 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때는 말이야, 여치를 잡아다 튀겨줘도 먹었어.

작가의 이전글 조심스러운 나는 설 곳이 없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