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치기, 그 아름다운 추억
나는 학창시절을 기숙사에서 보냈다. 기숙사도 기숙사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내가 있던 곳은 학생 숙소라기보다는 교정 시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소년원은 아니었고, 해외에 있는 유난히 엄격한 기숙사였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은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보통 유난인 곳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엄벌주의가 허황된 생각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기숙사는 악명 높은 빠른 통금과 숙소 내 음식물 반입 금지, 개인전자장비 사용 금지(노트북을 쓸 때도 반출대장에 사인 하고 가져가야 했으니...)에 온갖 자잘한 규칙이 있는 편이었는데, 적당한 정도의 통제였다면 이게 먹혔겠지만 과도한 압제는 십대 소년들의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통금이라던가 기상시간이라던가 하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제일 중요한 문제는 식량의 조달이었다. 우리는 모두 십대 소년들이었고, 우리에게는 과자와 라면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몰래 들여오다가 적발되곤 했다. 아니면 주말에 한인 식당에 가서 라면을 먹기도 했지만, 해외에서 먹는 라면은 주제에 꽤나 비싼 음식이었다. 그리고 과자. 고등학생들에게서 과자를 빼앗아가는 건 아무리 학생들의 영양과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였다.
1층은 공용실, 2층은 학습공간, 3층은 숙소였는데 당연히 우리의 저장고는 3층이었다. 공용실이나 학습공간에 숨겨뒀다가는 점호에 대응할 수 없다. 입구가 1층이니 당연히 점호는 1층부터 시작되므로 3층에 음식을 보관하는 것이 가장 음식을 오래 숨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1층 입구에서 3층까지 무사히 과자를 숨겨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움직이는 것도 한두번이지,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좀 더 안정적인 자구책이 필요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입구로 들어올 수 없으면 담을 넘는다. 우리는 과자가 금지되며 단련된 강인하고 날렵한 몸을 가진 고등학생들이었다. 우리는 담치기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담치기. 담을 몰래 넘는 행위와 유사 행위의 총칭. 우리는 대담하게도 3층 베란다에서 1층까지 기어내려가고 기어올라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어떻게 했냐고? 십수 년 전의 일이라 디테일은 기억이 안 나는데, 확실한건 누구 하나 목 부러졌어도 이상할 건 없는 방식이었다. 3층 베란다 난간을 잡고 현관 위의 장식을 밟고 튀어나온 벽돌을 잡고 내려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재밌는 건 지금 하라고 하면 죽어도 못 할텐데 당시 우리 기숙사에서는 3층에서 1층까지 벽을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걸 대부분 할 수 있었다. 물론 올라올 때는 누군가 베란다에서 팔을 뻗어 잡아줘야 했지만.
밀반입의 방법과 종류는 점점 다양하고 치밀하고 대담해졌다. 담치기 루트는 두개로 늘어났고, 옷 속에 숨겨오는 물건도 다양해졌다. (당시에는 2023년 유행보다 훨씬 핏하게 옷을 입었으니,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방식이었다.) 우리 숙소에는 웨이퍼 스틱, 육포, 약과, 감자칩 류의 과자들이 늘 있었고 라면에, 전기포트와 냄비까지 베란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전기포트는 출력이 너무 낮아 물 끓이는 데 한 세월이 걸렸지만 베란다에서 몰래 먹었던 비빔 라면과 뽀글이의 맛은 전 세계에서 먹어본 어떤 별미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우스운 건 그 늘어난 과자들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층 교활하고 대담하고 강인해졌다. 우리의 기숙사는 늘 놀랍도록 청결했다. 절대로 점호때 필요 이상으로 뒤져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군살 찔 겨를도 없이 우리는 운동을 했다. 둔해진 몸으로는 담치기를 하다가 낙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목적을 가진 삶은 그렇게 날카롭고 아름답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