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모래 Jul 11. 2023

미운 사람이 하는 말이 모두 틀렸다면 좋았을 텐데

주의. 엑셀 가지고 일하는 얘기가 반이라 재미 없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이제 여자친구에게 주말에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여자친구는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하질 않았다. 내가 시간이 안 되냐고 묻자 여자친구는 자기가 부업 삼아서 엑셀 데이터 확인을 하는 일을 받아왔는데, 그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대답했다. 만나고는 싶은데, 계산이 서질 않는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래서 영화를 보는 대신, 우리 집에 틀어박혀 각자의 일을 했다. 나는 큐베이스를 열고 편곡을 하고, 후배는 그 뒤에서 열심히 엑셀을 두드렸다.


사실 엑셀 데이터 확인을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엑셀이란 게, 하나하나 데이터를 확인하고 하나하나 계산을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일텐데, 엑셀에 들어가 있는 데이터를 확인하는 걸 그렇게 오래 해야 한다니.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에게 굳이 더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여자친구는 내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고, 그건 여자친구가 페이를 받고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리저리 고나리질을 하면 내 성미야 풀리겠지만, 내 성미 하나 풀리자고 여자친구의 방식에 함부로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일 주일. 작업이 다 끝나가고 데이터를 넘기는 마지막 날, 여자친구는 어젯밤까지 멀쩡했던 엑셀 파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에 출근해 있던 나는 파일을 통째로 넘겨달라고 해서 점심시간 내내 복구를 해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자친구도, 여자친구의 직장 동료들도 모두 이것저것 시도를 해 보았다. 사무직이나 행정직이나, 회사원들은 한 번쯤은 파일이 날아가 그걸 복구해본 경험이 있으니까, 다들 자기가 아는 방법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밤잠을 줄여가며 했던 일이 허공으로 날아간 시점에 결국 나는 여자친구의 방식에 참견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내내 다시 밤을 설쳐가며 같은 일을 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여자에게 나는 내가 반나절만에 끝내게 해 줄 테니 내게 원본 파일을 넘기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보낸 파일을 열어본 건 내 일이 다 끝나고 집에 도착한 새벽 두 시 쯤이었다. 파일을 열어보고 나는 여자친구에게 파일을 넘긴 그 이름모를 회사의 이름 모를 담당자의 업무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이름모를 회사의 이름 모를 담당자'는 너무 기니까, 김철민 대리님이라고 부르자.


A열에 입력된 자료를 김철민 대리님이 데이터베이스를 보고 B열에 입력을 했는데, 이 B열에 입력된 내용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다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서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게 몇천 건이었다. 이걸 '실수가 없도록' 꼭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검색해서' 하나하나 대조를 해달라고 했단다. "내가 감히 조언하고 싶은 게 있읍니다. 엑셀 팡션? 사용 하지 마세요. 편리함이 있다면 위험성은 증대하죠."같은 상황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10건쯤 되는 자료의 비교라면 당연히 그냥 검색을 하나 '엑셀 팡션'을 사용하나 그 속도가 그 속도다. 그런데 이게 몇천건, 1만건에 가까워지면 당연히 '엑셀 팡션'이 더 빠르고, 빠를 뿐 아니라 정확하다. 나는 꽤나 꼼꼼하게 일을 하는 편이지만, 단순 데이터 체크를 컴퓨터보다 잘 할 자신은 없다.


내가 쉽게 말해 A열에 입력된 자료를 B열에 넣었고, 그걸 검증하는거라고 했지 지저분하게도 꼬아놨었다. 데이터베이스를 다운받아 시트 하나에 넣어두고, 데이터 검증용 (검증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써도 되나 모르겠다 정말이지) 시트를 하나 만들고, 담당자가 보내준 원본 시트에는 데이터 검증용 시트의 내용이 자동으로 반영되게 해 두었다. 사용해야 하는 함수의 종류도 두어 개면 충분했다. 이런 류의 단순 데이터 비교 업무를 해 본 사람은 알 거다. 여기까지 만드는데 20분정도 걸렸을 거란 것을. 그 중에서 15분정도는 '지저분하게도 꼬아둔 원자료'를 보면서 어떻게 수식을 짜야 엑셀의 E자도 모르는 사람도 쓸 수 있는 편안한 검증 시스템을 세팅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거기서 내가 맘 먹고 다 끝내려고 들었으면 세 시 전에는 다 끝냈을 것이었다. 수천 건 중에 실제로 오류가 있는 것으로 검출되는 내용은 7백 건 이하였고, 그것도 언뜻 보니 규칙성이 있어 보였다. (보아하니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다가 실수를 하신 것 같던데...) 실제로 문제가 되는 항목은 반 이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일의 마무리는 여자친구가 직접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생했던 일이니 마무리까지 직접 하는 게 맞다. 중간에 내가 도와준 건 그냥, 날려버린 걸 90% 정도 복구해 준 복구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다음 날 여자친구에게 파일은 전달했을 때 압도적인 감사 표현을 받았음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데 나도 엑셀의 E자도 모르는 그런 인간이었다. 내 전 직장은 말도 안 되게 좋은 직속 상사들과, 말도 안 되게 나쁜 그 윗사람들이 공존하던 곳이었는데, 실무에 필요한 엑셀을 배운 건 그 곳에서였다.


말도 안 되게 나쁜 그 윗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안 그래도 적은 인원에 격무에 시달리는 우리 부서로 끌어왔다. (그것때문에 말도 안 되게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다.) 내 말도 안 되게 좋은 직속 상사들 중에서도 내 사수는 내 앞에 떨어지는 업무량을 보면서도 내게 업무를 자세히 가르쳐 줄 수 있을 만한 물리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심지어는 이 사람이 화장실을 가는 모습도 몇 번 본 적이 없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업무가 있을 때 5분정도 내게 브리핑을 주고, 나는 그 사람이 만들어둔 기존 자료들을 보면서 업무를 익혔다. 기존 자료를 보며 알게 된 건 혼자서 네 명쯤이 해야 하는 일을 혼자 쳐내고 있는 사수의 비밀, '엑셀 팡션'이었다.


나도 일인분은 톡톡히 해 내고 있었는데, 나는 오전에 내 업무를 하고, 오후에는 사수의 일을 돕고, 다시 저녁 시간이 되면 내 업무를 맡는 식이었다. (야근할 때 일을 돕는다고 하면 사수는 절대 내게 일을 맡기질 않았다.) 오후에 사수의 일을 돕는 건 다소 여유롭게 했다. 그 함수들을 하나하나 공부해가면서 했으니까. 몇 달쯤 지나니 나도 사수와 비슷한 양의 업무량을 쳐낼 수 있는 사람으로 진화했다.


정도 많이 들었던 곳을 그만두게 된건 그 윗사람들 중 하나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분을 꺼려하다 못해 미워하게 되었는데,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챙겨 받는데다가 한없이 최저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직원들 귀에 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역량이 커지고 성장하는 거다, 역량을 더 키우면 해낼 수 있다고 말하던 것도 견디기 무척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나쁜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고, 타고나길 다소 천진하게 태어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남에게도 듣고 싶은 말일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이러다 죽겠다 싶은 안색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말을 들은 사람들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울상이 되곤 했다.


결국 이직을 하고 나서 느끼게 된 건, 내가 역량이 커지긴 했다는 것이었다. 이직을 하니 책임도 늘었고, 연봉도 늘었고, 업무의 범위도 늘어났는데, 업무의 총량은 전 직장의 반의 반도 되질 않았다. 그러니 여유롭고, 여유로우니 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도 나는 내 자리에서 혼자 웃으며 내가 역량이 늘긴 했네, 하고 혼잣말을 했었다. 이번에는 그게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김철민 대리님은 상상치 못할 방식이,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내게는 있었고, 그걸로 밥을 벌어 먹고 살고 있으며 그 돈으로 여자친구에게 맛난 걸 사주고, 함께 어딘가에 가고, 그러다 못해 여자친구의 일도 도울 수 있다니.


미운 사람이 하는 그 말이 모두 틀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하면 역량이 는다, 너의 역량이 부족해서 그렇다, 이게 성장하는 방법이다 하는 그 말이 모두 틀렸더라면 내 속이 얼마나 시원했을까? 그러나 정말 재수없게도, 그 말이 맞았다. 글쎄, 요즘 하는 대화들은 너무 감정적이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내 친구들도 일단 싫어하고, 내 친구가 들은 듣기 싫은 소리는 나도 같이 욕해줘야 하는 모양인데 세상에는 아직도(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이런 경우가 있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의 정말로 듣기 싫은 소리가, 정말 재수 없는 방법으로 맞아버리는 경우. 감정적인 세상이다. 듣기 싫은 사람의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세상이다. 우물 안 개구리를 인큐베이팅하는 세상이다. 그 미운 사람한테 안부 문자나 하나 보내야겠다. 직접 만날 만큼은 아니고, 안부 문자 하나 정도만큼만 그 사람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면 마음의 역량도 조금 늘어나려나.

작가의 이전글 관계의 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