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방촌 민속마을
3년 전 방촌마을의 집들을 처음 보고 나는 좀 놀랐다. 이 마을에는 수준 높은 건축 문화재가 여러 채 있다. 장흥에 와서 살게 된 것도 우연인데, 옆 동네에 이렇게 멋진 집들이 많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왜 그런 말 있잖은가. 책 한 권 읽은 자가 젤 겁난다고. 그때 나는 집 좀 안다고 생각했었다. 전국을 돌며 일하는 특성상 한옥 목수들은 여러 지역 전통마을과 고택에 익숙하다. 게다가 뭐라도 몰입할 대상이 필요했던 초보 목수 시절 나는 일 삼아 전통건축을 파고들었고, 공부한 건축물을 계획적으로 찾아다녔었다. 그렇게 5년쯤 지나자 전국의 이름난 건축물들은 왠 만큼 봤고, 알 만큼은 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던 당시의 내가 알기로는 이 근처에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이 정도의 고택들은 없었다. 장흥 사인정과 장천재, 강진 무위사 극락전, 보성 열화정, 영암 도갑사 해탈문 정도가 건축구조 논문이나 건축사 전공도서에 언급되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코 앞에 보물 아닌 보물 같은 집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장흥 온 지 몇 달쯤 됐을까, 근처에 멋진 고택이 있단 말을 듣고 자전거로 들러본 방촌마을 고택들은 기품이 있었다. 집도 한 두 채가 아니라 마을 전역 군데군데에 여러 채였고, 전라도 부농가 건물 배치 모습이 잘 드러나 흥미진진했다. 이곳 고택들은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 성주 한개 마을 같은 경북 내륙 고택들과는 다르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가치 있는 집들로 보였다. 20세기 초 상류층 주거 건축으로 남해안 지역의 특징과 시대성도 뚜렷했다. 게다가 방촌마을은 아직 이름난 관광지는 아니라서 농촌마을 원래의 생활풍속을 보는 재미가 있다.
방촌마을을 보며 나는, 아직 덜 알려졌지만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전국 곳곳에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마을의 형성
마을 이름 '방촌'은 들판을 가운데 두고 여러 동네가 이어져서 생긴 넓은 촌락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장흥 위 씨가 400여 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석장승과 지석묘군이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상징한다. 장승은 보통 마을로부터 1-2km 앞에 세워 동네를 알리는 표지판 구실을 했다. 정월 보름이면 지금도 주민제가 열리는 이곳 장승은 돌을 깎아 세웠다. 대략 3천 년쯤 전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은 방촌마을과 직접 연관은 확인되지 않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촌으로 검증된 곳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방촌마을과 인근 몇몇 동네가 백제시대 이후 오랫동안 주거 중심지였음을 전하는 기록이 있다.
장흥 위 씨 입향조(마을에 맨 처음 들어온 조상)는 석장승에서 가까운 마을에 터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서로 다른 성씨들이 함께 사는 동네였다. 인근 당동마을에서 분가한 위 씨의 지손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소수파였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자손이 번성하고 마을이 확장하면서 지금의 규모 있는 위 씨 집성촌이 됐다. 방촌마을 형성과정은 전국 다른 씨족마을들의 발전경로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안동 하회마을은 장가 온 풍산 류 씨가 번창하고 다른 성씨들이 줄어들다가 류 씨 집성촌이 됐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고, '징비록'으로 유명한 류성룡 같은 고관의 출현은 집성촌 형성의 촉매제가 됐을 것이다. 다른 마을들도 이와 유사하다.
방촌마을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여섯 가구의 고택은 모두 장흥 위 씨 종가와 지손들의 집이다. 입구에서부터 근암고택, 판서 공파 종택, 존재 고택, 죽헌 고택, 신와고택이 있고,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와 차 길 건너편 마을에 오헌고택이 있다. 씨족마을의 확장 과정도 대체로 이 순서와 비슷하게 점진적으로 진행됐다. 여섯 채의 고택 중에서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근암고택과 판서 공파 종택이 위치한 곳이 집성촌으로서 방촌마을의 시작점이다. 고택 여섯 가구 중 국가지정 문화재는 존재 고택, 신와고택, 오헌고택이고, 나머지 근암고택, 판서 공파 종택, 죽헌 고택은 지방문화재다. 또 1993년 방촌마을 자체가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됐다.
견고하고 절제된 근암고택
근암고택은 첫 번째 마을 중간쯤에 위치했다. 이 고택은 인접한 판서 공파 종택 보다 한 두 세대 후대에 지어진 듯하다. 집 터에 위 씨가 살기 시작한 것은 1649년 부 터지만 지금 건물은 1910년에 보수했다. 후대에 부속채들을 정돈한 탓에 건물이 한채 남아 있지만, 이 집 안채는 방촌마을 고택의 안채 중 가장 오래됐다.
근암고택에는 근래에 퇴직하신 아드님이 노모를 모시고 집을 관리하며 거주하고 있다. 나는 이 집에 세 번 다녀왔는데, 두 번째 답사였던 2021년 1월에는 한 마을 사는 어느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는 인근 마을 형님이 동행했다. 당시 툇마루에 나와서 답사 일행을 정겹게 맞아주던 아흔 넘으신 노부부의 선한 인상이 떠오른다. 근래의 세 번째 답사에는 퇴직한 아드님과 노모만이 계셨다. 노모께서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고택의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단아하고 위풍당당한 안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속채들이 정리된 너른 마당에 홀로 서 있지만 집은 전혀 왜소해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은 마을의 다른 고택 안채들에 비해 규모가 작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 집이다. 가운데 세 칸만 툇마루를 설치했고 양 협칸은 툇칸까지 방을 늘려서 사용했다. 집안을 안내해주신 아드님 얘기로는 원래 집 뒤에 있던 'ㅁ'자 집을 현재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그 목재 일부를 재사용했다고 한다. 원래의 집터는 정돈해서 넓은 텃밭으로 사용 중이다. 앞의 마당과 뒤 텃밭이 넓게 정돈 되고 시야가 멀리까지 트여 건물이 더 강조되는 느낌이다.
근암고택 안채는 기둥과 보 도리 등의 구조부재 규격이 크고, 겹처마를 하지 않은 지붕선이 어울려 단단하고 절제된 기품이 있다. 특히 일반 집들에 비해 높은 기단(토방, 건물이 놓인 대)이 건물을 돋보이게 한다. 경사지에 집을 지으니 건물 뒤쪽과 앞쪽 지반 높이차가 생기는데, 방바닥이 수평 지도록 앞쪽에 높은 단을 쌓아 올렸다. 우뚝 솟은 기단 위에 단단하게 짜인 건물을 올려놓으니 더욱 당당해 보이는 것이다.
집이 아름답게 보이는 또 다른 비결은 지붕이다. 팔작지붕은 세 개의 지붕마루 선에 의해 조형미가 결정된다. 지붕 맨 위 가로방향으로 용마루, 용마루선이 끝나는 양쪽 끝에서 전후면으로 뻗은 내림마루, 다시 내림마루 끝 부위에서 건물 모서리로 뻗어 나가는 추녀 마루다. 그런데 이 집은 다른 팔작지붕보다 추녀마루선을 길게 만들어 우아한 맛이 난다. 이를 위해 내림마루 위치를 건물 안으로 옮기고 크기도 줄였다. 따라서 지붕 위 측면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벽체부위인 합각 벽이 유난히 작아졌다. 그 결과 이 집은 팔작지붕임에도 합각 벽이 없는 우진각 지붕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그래서 건물이 더 우아해 보인다.
800년 전 군청 자리에 선 집_ 판서 공파 종택
판서 공파 종택은 1600년대 초 위 씨가 입향하던 시기에 자리 잡았다. 근암고택과 더불어 장흥 위 씨 씨족촌의 시작 점인 이 고택은 14대에 걸쳐 350년 동안 종갓집이었다. 지금 건물은 기존 집을 헐어 내고 1940년대 새로 지은 집이다. 그러나 사당 건물은 300여 년이나 됐다. 이 집의 사당 건물은 종갓집답게 크고 기품이 있다. 다른 고택들의 사당이 한 칸짜리인데 비해 판서 공파 종택의 사당은 3칸이다. 여느 사당 건물처럼 맞배지붕을 했는데 단아한 조형미가 눈에 띈다.
안채의 기단 앞으로는 동백나무들을 비롯한 정원수들이 가꿔져 있고, 높은 기단의 오르내림을 돕는 난간과 계단이 있다. 이것은 근래에 새로 조성한 편의시설로 보인다. 이 집처럼 안채 앞에 정원수를 심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안마당은 관혼상제 같은 집안 대소사는 물론, 추수한 곡물을 손질하는 다용도 공간이다. 판서 공파 종택에서는 아마도 어느 시점부터 이런 쓰임이 사라지면서 관상용 수목을 심은 것 같다.
판서 공파 종택 집터는 마을 역사를 전하는 특별한 이력이 있다. 여기는 고려 후기 230년(1149년- 1379년) 동안 관청이 있던 자리다. 고려 말기 회주목 장흥부(지금의 군)의 동헌과 객사가 여기에 있었다. 800여 년 된 일이지만 지금도 인근에 객사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지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고려말 인종의 '공예태후' 임 씨의 고향이 인근 당동마을인데 태후의 고향이라 해서 행정단위를 승격하고 지금의 방촌마을을 군청 소재지로 삼았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이 잦고 피해가 극심하자 나주로 이전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현재의 장흥읍내로 이동하면서 행정중심지가 개편됐다. 이 일대를 "고읍"이라 한 것도 그때부터인데, 지금도 "고읍천"이라는 개천 이름이 있다.
판서 공파 종택은 조선 후기 집성촌의 성립과정을 보여주는 산실이자, 그로부터 500년 전사도 함께 전하는 흥미로운 집이다.
실학자의 집_ 존재 고택
존재 고택은 이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의 생가다. 존재 위백규는 지역사회에서 평생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노년에는 정조에 의해 관직에 나서기도 했다. 평생 다량의 저술을 남겼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인근 명산인 천관산의 장천재는 그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던 문중 서당이었다. 장흥읍내와 향교가 가까운 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존재 고택도 방촌마을의 다른 고택들처럼 기존 건물을 헐고 1937년에 신축했다. 그러나 이 터에 처음 집을 지은 시기는 17c말에서 18c 초엽으로 확인된다. 전체적인 배치 구조는 초창 당시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집은 앞서 본 다른 두 집들보다 규모가 크다. 총 다섯 동의 건물이 있는데, 안채와 사당, 서재, 헛간채, 대문채로 구성된다. 대문 밖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이 처럼 규모가 큰 반가의 등장은 당시의 경제 상황과 연관 있다. 조선 후기에 농경 기법이 혁신되고,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지역사회에 부농들이 출현하는데, 존재가 살았던 시기에 장흥 위 씨들도 재력을 키웠던 것 같다.
존재 고택도 대지가 넓고 개방적이며, 언덕 위에 집을 앉혀서 전망이 훌륭하다. 안채는 안온한 안마당을 가지고 있다. 좌우로 서재와 헛간채가 있고 전면에는 문간채가 있어서 사각 마당이 만들어졌다.
안채는 좌우측에 퇴칸을 덧붙인 전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이다. 살림 규모를 나타내듯 평면이 크고 집이 당당하다. 기단은 자연석을 다듬어 줄 바르게 쌓지 않고 한 층에서도 돌의 높낮이가 다르게 허튼층 쌓기를 했다. 이런 기단은 자연스럽고 정감 있는 입면이 특징이다.
기둥과 보 도리 등 구조재로 쓰인 목재가 굵고 실한 것도 집안의 경제력을 나타낸다. 특히 방촌마을에서 가까운 천관산과 인근 야산에 좋은 목재가 풍부했다고 한다.
안채 북동쪽으로 여러 단의 자연석 계단을 오르면 사당이 있다. 언덕 위에 지은 사당은 지대가 높아 올라서면 들녘이 내려다 보인다. 집의 가장 높고 좋은 위치를 택해 서당을 안치한 것은 조선시대 반가 건축에서 일반적인 건물 배치 방법이었다.
사당 건물은 툇마루까지 설치하고 한껏 장식도 했다. 지붕 측면의 널이 부착된 풍판은 밑면이 W모양으로 특이하게 장식되어 있다. 문은 전면에만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중앙에 장방형 빗살을 넣은 불발기창을 만든 것도 눈에 띈다. 존재 고택 사당은 특별히 공을 들인 모습이다.
존재 고택 안채 옆으로는 장독대와 암키와장으로 쌓아 멋을 부린 굴뚝, 우물 등이 있다. 대지가 여유로워 특별한 조경 없이도 고즈넉하고 편안하다. 장독대 옆에 심은 유자나무 한그루가 운치를 더한다.
존재 고택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물은 안채 앞에 있는 서재다. 존재 위백규가 사용한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존재 고택이 다른 고택들에 비해 단정하고 담백한 맛이 나는 것도 안마당에 있는 이 서재의 영향 같다.
이 건물은 사람이 기거하는 건물로는 방촌마을 고택 중에 가장 오래됐다. 1775년 개축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이 서재는 안채와 따로 지어져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사랑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존재 고택 서재는 당시 전국에서 등장한 일반적인 사랑채와는 위치와 기능면에서 차이가 크다. 조선 후기 반가 건축의 사랑채는 위세를 과시하듯 집의 전면에 돌출해서 짓고, 손님 진입 구역과 안마당을 명확히 구분하며 외부로부터 여성들의 구역을 철저히 격리하는 모습이다. 반면, 존재 고택의 서재는 안마당 안에 짓고 안채와 거의 맞대고 있다.
또 행랑채 공간이 멀리 있어서 일꾼들의 업무나 농사일을 지휘 감독하는 외부 업무 지휘통제소로서도 적합해 보이지 않다. 즉, 존재 고택 서재는 위치나 기능으로 볼 때 일반적인 사랑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서재 건물은 오히려 조선 전기의 사랑채 또는 사랑방들과 유사하다. 이 서재가 지어지기 이전 시대인 조선 전기에는 실제로 사랑채가 안채와 붙어 있거나 심지어 같은 건물에서 일부 공간만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아직 남성의 독립적 공간으로서 사랑채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어중간한 사랑채라고도 할 수 있다.
존재 위백규 선생이 학문했다는 서재는 안채 쪽으로는 벽을 두르고, 반대편에 툇마루를 설치해 독립성을 확보했다. 방 1칸, 마루 1칸의 최소화된 평면 구조다. 아궁이는 부뚜막 없는 함실아궁이를 설치했다. 지붕도 독특해졌는데 안채랑 접촉하는 부위는 지붕 간 충돌이 없도록 돌출하지 않는 맞배지붕을, 반대방향은 모양을 살려 팔작지붕을 했다.
난간 대용으로 굵은 왕대나무가 무심하게 걸려있다.
민속생활상이 잘 보존 집_ 신와고택
방촌마을 가장 안쪽 깊숙이 있는 신와고택은 큰 대지에 건물도 많은 대농가임에도 아기자기하고 볼 게 많아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신와고택은 농사를 크게 짓고 살던 당시의 살림살이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건물은 무려 7동이나 된다. 안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헛간채, 축사, 문간채. 여기에 딸린 우물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안채는 다른 고택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바로 앞에 또 한 채의 큼지막한 건물이 있어 이채롭다. 한 마당 안에 사랑채가 안채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신와고택 사랑채는 외양간과 정지를 갖추고 방 4칸과 대청마루가 있다. 이 집 사랑채의 평면 구성은 일반적인 사랑채와는 전혀 다르다. 남성 가장이 독립적으로 사용하며, 외부 손님맞이에 특화된 보통의 사랑채는 정지가 없고, 마구간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신와고택의 사랑채로 불리는 이 건물은 독립 세대가 별도의 살림이 가능하도록 모든 생활 설비를 갖춘 집이다.
신와고택처럼 안채 앞에 또 한 채의 살림집이 있는 배치 형태는 제주도에 일반적인 민가 형태다. 제주도에서는 나란히 두 채의 살림집을 두고 부모가 안채에 살다가 자녀가 장성하면 장남이 결혼해서 아래채에 살도록 했다. 두 건물은 서로 마주 보고 서는데, 제주도 방언으로 안채를 안 끄리, 바깥채를 밖 끄리라 불렀다.
남해안 일대의 건축구조는 전통적으로 제주도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데 신와고택이 그런 영향을 보이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형태상 제주도 민가 평면과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와고택처럼 부모와 장남의 살림이 한 가옥에서 이뤄지는 경우 세월이 흐르면 자리바꿈이 있기도 했다. 부모가 노쇠하거나 홀로 남고, 손주들이 장성하여 공간이 부족해지면 자연스럽게 서로 건물을 바꿔서 살았던 것이다.
사랑채 앞의 담장이 일부 뚫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담장 밖 우물로 통하도록 일부러 낸 출입구인데 이 계단으로 온 가족이 아침저녁으로 왕래했을 것이다. 식수 조달, 식재료 손질, 빨래, 세면까지 온 가족이 함께 사용했던 우물이다. 그런데 신와고택에는 안채 저편으로 또 하나의 우물이 있다. 이 정도의 가옥 규모라면 전성기 시절 거주 인원이 20-30명은 충분히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일꾼들이 거주하는 건물의 사람들이 매일 씻고 살림을 하기에는 우물 하나로 불편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채 안에 외양간이 있는 구조는 일반적인 민가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도 정지 한편에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함께 있었다. 또 지금 내가 리모델링해서 살고 있는 장흥 촌집의 아래채에도 과거 부엌과 외양간이 한 칸에 있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는 강원도 산간지방에 가면 더 흔했다. 겨울철 추위로부터 재산 목록 1호인 소를 보호하고, 집안에서 키움으로써 맹수들의 습격에 의한 피해도 방지했다.
신와고택이 보여주는 대농 가옥의 민속사적 재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간채에는 대문 양편으로 방과 광이 배치됐는데 흥미롭게도 광은 복층구조를 했다. 천장 위에 마루를 깔고 집 안 마당 쪽에서 계단을 설치해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재미난 마루는 일꾼들의 여름철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더운 여름밤에는 이 마루에서 자기도 하고, 농한기 한낮 불볕더위에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묻혀 목침 베고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신와고택은 남해안 지역 대농 가옥의 살림규모가 잘 나타나고, 당시의 생활상이 있던 그대로 잘 보존된 집이다.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 국가지정 문화재가 된 고택이다.
기품있는 상류건축 오헌고택
오헌고택은 다른 고택들과 달리 건넌 마을에 있다. 오헌 위계룡(1870-1948)이 완성했다. 안채와 사당은 1918년에 지었고 사랑채는 1922에 지은 것으로 봐서 방촌마을 고택들 중 가장 근래에 지은 듯하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 방법이나 전체적인 기풍이 죽헌 고택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오헌고택은 방촌마을 고택 중 가장 크고, 격식을 잘 갖춘 상류층 건축이다. 안채, 사랑채, 안 행랑채, 사랑 행랑채, 사당, 곳간채, 헛간 2동까지 8채의 건물을 거느렸지만 대지가 워낙 넓어서 개방적이고 활달하다. 사랑채 밖으로는 전통건축의 전형적 모습의 연지(연못)까지 갖췄다.
오헌고택은 축조 당시 공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다양한 민속생활사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2012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오헌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의 완벽한 독립성에 있다. 안채가 있는 안마당 권역과 사랑채가 있는 사랑마당 권역이 각각 출입문을 갖고 완전히 구분된다. 또 안채에 안 행랑채, 사랑채에 사랑 행랑채가 별도로 지어진 것도 보기 드물다. 이는 당시 최고급 상류층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격식이다. 여성 손님은 안 행랑채를, 남성 외부인은 사랑 행랑채를 사용했다.
각 권역별 공간도 명확히 구분된다. 안마당과 사랑마당의 독립성은 물론, 헛간채가 있는 작업공간과 바깥마당에서 집으로 들어오기 위한 진입공간 등 용도와 위계에 따른 공간구분이 뚜렷하다.
사랑마당으로 진입하는 대문은 집 앞 연지에서 곧장 들어가도록 나 있다. 반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사랑채를 옆으로 끼고 진입하는데 동선을 한 차례 꺾어서 변화를 줬다. 사랑채 오른쪽 1칸을 덧달아 옆으로 돌출시켜 놓고,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돌출 부위에 막혀 직선 방향의 안채 부엌 쪽이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가렸다. 방문객은 대문 진입 후 오른쪽으로 꺾어서 안마당으로 진입한다. 사생활 보호를 위한 동선 배치다. 대문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마당 안에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안채를 중심으로 축선상에 배치했다. 사랑채 바깥마당에는 큰 연지가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긴 전형적인 방지원도형 연지를 약간 변형시킨 모습이다. 방지원도는 사각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중앙에 동그란 섬 형태를 둔다. 이 섬에는 신선이 산다는 석가산을 조성하기도 했는데, 죽헌 고택의 연지는 자유곡선의 연못에 섬을 두 개 만들고 소나무와 오죽을 심었다.
사랑채 바깥에 나무 굴뚝이 눈에 띈다. 이 굴뚝은 사랑채 마당 왼쪽에 지은 두 칸짜리 건물의 굴뚝이다. 온돌방 한 칸과 대청마루 한 칸을 한 이 건물은 손님이 왔을 때 사용하던 방이다. 사랑채 앞에는 월계수 나무, 향나무, 치자나무, 영산홍, 매실나무 등을 심어 정원을 가꿨다.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 유행했던 도교적 취향의 연못과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