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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Nov 25. 2021

정원이 아름다운 집

 "한국 민가정원" 지정, 장흥 죽헌 고택



죽헌 고택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 두 채가 더 있다. 왼쪽 마당 가에는 헛간채가, 오른쪽 높은 석축 위 언덕에는 따로 단을 두고 정갈하게 자리 잡은 사당이 있다.

그 외에도 안채 가까이 마당 오른쪽에 낮게 돌을 쌓은 단의 흔적이 남아있다.


별당 터


나는 지난번 답사 때에도 혹시 이곳에 건물이 더 있지 않았을까 궁금했었다. 이 자리는 주변이 넓게 정돈되고 경관도 좋아서 안사랑채 자리로 적당해 보였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안내해주신 주인 말씀으로는 이곳이 별채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내 짐작이 맞았던 것이다. 고택에서 나고 자란 집주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그 건물은 여성 손님이 오면 묵는 장소로 쓰였다. 남자 손님이 묵는 사랑채와 별도로 사잇담을 두른 안채 구역에 짓고 여성 방문객의 숙소로 쓴 것이다. 대체로 어머니 쪽 집안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셨다고도 한다.


이런 건물을 별당 또는 안사랑채로 불렀다. 조선 후기에 호화롭게 지은 지방 저택 중 '아흔아홉 칸' 대규모로 잘 알려진 강릉 선교장에는 안채 가까이 양편으로 동별당과 서별당이 있다. 선교장과 비슷한 건축 연대로 1천 석 넘는 부농 집안 저택인 정읍 김동수 가옥에도 안사랑채가 있다. 김동수 가옥의 안사랑채는 집 전체에서 가장 안쪽 깊숙이 위치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 우측에 사랑채와 사랑마당이 있다. 직선 방향으로 다시 안 행랑채를 지나면 안마당과 안채가 나오고, 옆에 따로 마당을 갖춘 안사랑채가 있다.  

이처럼 안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별당은 집주인의 자녀나 노모의 거처였고, 여성 손님이 머물기도 했다. 혼인 전의 딸이나 시집 온 며느리도 사용했을 테니 '별당아씨'라는 말이 유래했을 것이다.

죽헌 고택의 별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증을 통한 복원으로 원래의 배치 공간감을 되살리면 좋겠다.   

  

헛간채


장흥 죽헌 고택 헛간채 (2021. 11. 장흥)


헛간채는 곡식을 보관하는 등의 다용도 수장 공간으로 쓰였다. 살림살이가 보관되니 안채의 정지와 가까이 배치된다. 규모가 큰 고택에서는 농기구 보관이나 마구간 등의 용도와 일꾼 숙소를 겸한 바깥 행랑채를 두고, 따로 안채 가까운 곳에 안 행랑채나 헛간채를 뒀다.


죽헌 고택에도 원래는 지금의 헛간채에 더해 대문간 행랑채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지금 헛간채의 모습은 집주인 어린 시절과 같다고 한다.        

평면은 'ㄱ'자 꺾인 집으로 7칸이다. 측간(화장실) 2칸과 전면 벽체가 없는 수장 공간 2칸, 판문이 달린 곳간 2칸, 퇴비 만드는 공간이 나머지 한 칸이다.


지붕은 볏짚 엮어 이엉을 얹은 초가지붕이다. 과거 농촌 마을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집마다 볏짚을 가져다 옆으로 길게 엮어 발을 만들었다. 둥글게 만 이엉 뭉치를 처마 끝에서부터 한 단씩 상하 겹쳐가며 위로 이어간다. 이엉을 다 깔면 처마 끝에 위아래로 대나무를 옆으로 대고 새끼줄을 묶어 고정한다.  


죽헌 고택 헛간채 초가지붕을 엮은 새끼줄은 사선으로 묶인 마름모 문양이다. 바람이 많은 남서해안에서 쓰던 묶기 법이다. 평야지대에서는 보통 평행 줄로 묶는데, 태풍 피해에 대비한 제주지역 샛집(억새풀로 이은 집)에는 이보다 굵은 새끼줄을 써서 직사각형 문양의 격자 묶기를 했다.

죽헌 고택 주인은 요즘 생산되는 볏짚은 길이도 짧지만 무엇보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초가지붕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전통 흙벽 바름


헛간채 흙벽 바름. 논에서 퍼온 흙에 볏짚을 이겨 발라서 연한 검은색이 보인다. ( 2021. 11. 장흥)


죽헌 고택 헛간채 판문을 열어보면, 서까래 사이에 발라진 천장 황토흙보다 유난히 거무스름한 벽체 흙벽이 눈에 띈다. 주인분 말씀으로는 논에서 흙을 퍼다가 볏짚을 섞어 바른 것이다. 논 흙은 퇴비 성분이 많아 어두운 카키색이나 다크 그린에 가깝다. 바른 후 습기가 빠지니 검은색이 된 것이다. 논 흙은 수렁의 진흙처럼 찰지고 접착력이 좋으니 벽체 바름으로는 탁월한 선택 같다.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평가할 때 기법과 재료의 "진정성"을 본다. 여기서 "진정성"은 특정 시대에, 그 지역에 통용되던 기법을 사용해, 그곳의 재료로 만든 고유의 것인지를 보는 기준 개념이다. 헛간채 벽에 발라진 거무튀튀한 논 흙 바름도 바로 그런 재료상의 가치가 있다.


만약 누군가 덜 이쁘다고 천장과 똑같이 황토흙을 발라 고쳐 놓으면 오히려 문화재 훼손일 수 있다. 실제로 문화재 보수 공사 시 재료나 기법상 특이한 광경을 보는 경우가 흔하다. 이때 설령 그것이 일반적인 사례나 방법에서 벗어났더라도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며 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죽헌 고택 헛간채 내벽의 논흙 바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당


사당과 노거수(포스 작렬 감나무) (2021. 11. 장흥)



사당은 단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초소형 건물이다. 그러나 전혀 왜소하지 않다. 마을 앞 들판 멀리까지 조망되는 탁 트인 자리에서 집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독차지하고 서 있다. 왠지 오히려 작아서 더 강조되는 느낌이다. 100년은 넘었을 기품 있는 노거수 한 그루가 사당 앞을 버텨 서서 신비감마저 든다.


나는 비슷한 감흥을 창덕궁 후원에 있는 애련정에서 느낀 적이 있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 건축 조경술의 총집약이자, 정점의 경지를 보이는 최고 전통정원으로 평가된다. 이곳은 또, 정교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 목조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정자 건물이 많다. 애련정도 그중 하나다.


애련정은 극도로 정교하고 단정한 초소형 정자다. 자연 지세를 따라 정돈된 숲 길을 걷다가 작은 골짜기에 접어들면 문득 드넓은 호수(애련지)가 나타난다. 물 건너편 호숫가 축대에 겨우 두 사람 정도만 사용 가능한 정자가 보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애련정에서 나는 작아서 극대화된 정취를 맛봤다.


장흥 죽헌 고택 사당도 특별한 조경이나 인공적 건축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입지와 주변 경관에서 오는 상쾌함 때문인지 사당이 한층 돋보인다.


한국 민가정원

장흥 죽헌 고택 안채 우측 언덕과 사당 주변의 빼어난 경관 (2021. 11. 장흥)


퇴직 후 고향집에 내려와 고택을 관리하며 지내는 장흥 죽헌 고택 주인은 매우 부지런하시다. 집에 애정도 많아 손수 산책로를 정비 중인데, 답사 당일 나를 데리고 집 뒤 산책로를 따라 자생한 수목들이며 숲을 설명하셨다. 죽헌 고택은 대지 외에도 언덕과 뒷 숲까지 그 면적이 수천 평에 달한다.


주인은 고택 뒤로 오랫동안 숲에 묻혀 사용되지 않았던 오솔길을 복원해 다듬고 있었다. 대밭을 정리하자 숨어 있던 동백나무 수백 그루가 드러나면서 동백숲 언덕으로 변신했다.


길 이름을 "고택 산책길"로 지었다며 자랑하셨다.

장흥 죽헌 고택은 지난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산림수목원에 의해 '한국 민가정원'에 지정됐다.

감나무, 단풍나무, 유자나무, 배롱나무 등 이 지역의 수목들과 지세가 잘 어울려 경관이 빼어난 민가의 정원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장흥 죽헌 고택의 사랑채에 꾸며진 정원 (2021. 11. 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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