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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Dec 01. 2021

천년 고찰의 위안

장흥 보림사



보림사는 장흥 북부 계곡 사이에 숨은 천년 고찰이다.

골짜기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어느 모퉁이를 돌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절터가 나온다.

보림사는 산속에 있지만 등산 없이 일주문이 나오는 평지 사찰이다.

비좁은 계곡 사이에서 나타난 너른 대지도 뜻밖이지만, 바로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진입하게 되니 급반전 느낌이다.

산 자락이 겹겹이 감싼 절 터는 아늑하다. 마음까지 편안해져서 왠지 환대받는 기분이 든다.


나는 2013년 초봄 보림사를 처음 봤다. 한옥 목수로 문화재 보수공사 일을 하러 왔었다.

그때의 포근하고 한갓진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후 몇 번 더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새삼 매혹된다.

이번 답사는 날씨까지 더없이 화창했다.  


천년고찰의 흥망성쇠


보림사는 1천250년도 더 된 통일신라 시대(759년)에 처음 터를 잡았다.

당시는 불교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던 때다. 보림사는 불교개혁 분위기 속에 탄생하고 성장했는데, 아름다운 절터는 이와 관련 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왕실에 의해 적극 수용된 불교는 수백 년 동안 왕권 뒷받침에 활용됐다.

미륵사지, 정림사지, 황룡사지 같은 고대 호화 사찰들이 왕실 주도로 삼국 수도 한복판에 들어선 것도 그 시대 불교의 성격을 말해준다.

통일 신라 왕국의 권력의지와 자신감이 나타난 감은사나 불국사의 조영도 마찬가지다. 초기 불교는 왕실이나 중앙귀족 같은 상류 특권층의 것이었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탑과 석등 (2021. 11. 장흥)


통일신라 후기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보림사는 이때 명성을 날린다.


중앙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이 득세하는 혼란 속에 불교계에도 변화가 일었다.

여기에는 이해관계가 비슷한 두 세력이 앞장섰다. 중앙권력에서 배제된 지방호족과 참선을 내세우며 주류에 비판적인 선종이다.

지역 기반을 강화하던 호족들이 후원하고, 개혁을 주창한 선종이 주도해서 전국 산간에 새로운 사찰이 속속 들어섰다. 잘 알려진 선종의 '구산선문'이다. 장흥 보림사는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성립한 제1선문인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었다.


수도와 대도시를 벗어나 산속에 처음 들어서는 절들이 빼어난 경승지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당시 아직 사람이 살지 않던 산속에 절터를 고르는데 활용된 최신 이론이 바로 중국에서 이제 막 들여온 풍수지리설이었다.

그러니 이 절들의 경치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셈이다.  


보림사는 뒤에서 보겠지만 조선초기까지도 사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림사는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서 거의 폐사 상태에 처했다. 전라도 사찰 중에는 구한말 동학운동이나 일제강점기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쓰이다가 화를 당하거나, 한국전쟁의 피해를 입은 예가 많다. 보림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다행히 보림사의 석조물과 철불은 화마를 이겨내고 보존됐다. 사천왕문도 화재를 면했다. 1960년대 이후 순차적인 복원공사가 꾸준히 지속된 후 지금의 모습을 회복했다.

전란의 상처에도 보림사에는 빼어난 문화재가 많아 천년고찰의 위엄은 건재하다. 국보로 지정된 석등과 석탑, 불상 외에도 부도와 탑비 같은 지정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진입부


사천왕문 (2021. 11. 장흥)


경내는 크게 네 권역으로 구분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까지의 진입공간, 석탑과 석등이 있는 대적광전 권역, 중층 불전인 대웅보전 권역, 그리고 부도와 탑비가 있는 석축 위까지. 그밖에도 스님의 요사채와 부속 건물이 주불전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나오는 사천왕문은 보림사의 목조 건물 중 유일한 지정 문화재다.

세 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에 통로를 두고 양편에 사천왕상을 안치했다. 보물로 지정된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것으로 목조 인왕상 중 가장 오래됐다.


사천왕문(현판은 사천문)은 조각장식이 화려한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이다. 중앙칸 기둥머리를 가로로 연결한 창방 밑에 또 하나의 두툼한 인방재가 걸려있다. 자세히 보면 부재 두 개를 겹쳤는데, 상부 무게로 처지지 않도록 보강했다. 그 위에 작은 받침목 두 개가 창방을 지지하고 창방 위로 현판을 달았다. 이런 배려는 실제 변형이 없더라도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보림사 석탑과 석등 (2021.11. 장흥)


평지 사찰


보림사 경내에 들어서면 드넓은 평지에 건물들을 펼쳐 놓은 이색적인 배치 방식이 눈에 띈다. 더 자세히 둘러보면 주불전이 두 개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보림사는 산지에 들어섰지만 넓고 평평한 대지를 닦은 평지 사찰이다.

각 건물별로 지대의 높이 차이가 없고 건물끼리의 간격도 널직하게 배치해서 전체적으로 개방감이 좋다. 이는 한참 후대에 깊은 산중에 들어선 절들과 대비된다.


조선시대 산지 사찰들은 마당을 중심으로 뒤에 대웅전, 좌우 부불전, 전면에 누각이 있는 '중정형'이 대부분이다.

비좁은 경사지를 깎아 터를 닦느라 공간 제약이 컸기 때문에 건물들이 한데 모여있다. 경사지에서는 여러 채를 한 꺼번에 지을 수 있는 넓은 대지를 만드는 것보다 작게 여러 단을 만드는 게 합리적이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산지 사찰은 건물별로 단차가 있고, 가운데 마당을 두고 빙 둘러싼 형태를 취해서 폐쇄적이다. 전국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배치 방식이다.    

 

보림사처럼 산간 평지 사찰로 널직하게 지은 절이 아주 드문것은 아니다. 보림사와 비슷한 시기에 개창했고 일찍부터 사세가 컸던 김제 금산사나 보은 법주사같은 절은 보림사보다 훨씬 광대한 절터를 자랑한다. 이 절들은 억불정책속에 소규모로 지어야 했던 조선시대 산지사찰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개창됐기 때문이다.  

        

보림사 대웅보전. 필자가 보수공사에 참여한 건물. (2021. 11. 장흥)


두 개의 주불전


사천왕문에서 직선 방향에 대적광전이 있다. 건물 앞에 극강의 공을 들인 석등과 석탑이 있으니 이 건물은 의문의 여지없는 보림사의 주불전이다. 대적광전이라는 명칭은 비로자나불을 안치한데서 유래했다. 깨달음의 빛과 정적이 가득한 곳으로 비로자나불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주로 화엄종파의 본전에 쓰였다.


그런데 보림사에는 사찰 진입부에서 이 건물로 이어지는 축선과 직교하는 방향에 이층짜리 주불전이 또 있다. 층이 거듭(중)됐다 해서 중층이라 부르는 이 건물은 석가모니불을 안치한 대웅보전이다.

한국건축에서 중층건물은 그 자체로 위상이 남다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에도 근정전, 인정전 같은 정전에만 있고, 사찰에서도 전국에 10여 채가 안될 만큼 드물다.

중층건물은 건축구조상 고난도 공법에 대규격 부재도 다량 필요하니 비용이 많이 들어 제한적으로만 지었다.    


그러니 보림사에서 기존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외에 새로운 중층 불전이 지어진 것은 단순히 부속건물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심권역을 새로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의 건축양식은 숭례문과 비슷한 조선 초기 모습이다. 실제로 현재 건물은 1984년에 복원했지만 소실 전 대웅보전은 국보로 지정된 중요 문화재였다. 결국, 보림사는 조선 초기에 사세를 떨쳐 크게 중창을 했던 것 같다.

조선왕조 개창 초기 불교 억제 정책을 강하게 폈던 시기에 중층건물을 지을 만큼 보림사의 위세가 높았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한편, 보림사처럼 후대에 중심권역이 새로 생기면서 서로 다른 중심축을 가진 사찰의 예는 더 있다.

구례 화엄사에도 중층건물인 화엄사 각황전과 별도로 대웅전이 있고, 보은 법주사도 서로 교차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보인다. 두 사찰 모두 해당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세가 컸던 영향력있는 절들이다.

  

보림사 석등과 3층 석탑 (2021.11.장흥)


 삼층석탑과 석등


보림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 석탑(불탑)과 석등이 있다.  

부처의 사리를 안치했던 인도 '스투파'에서 유래한 불탑은 불전과 함께 사찰의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다.  사이 배치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서 사찰 건립시기를 밝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사찰은 아예 탑을 안 만들기도 했지만, 불교 유입 초기인 삼국시대 사찰의 탑은 아주 중요했다.

고대 불전(당시는 '금당') 앞에는 반드시 탑을 세웠다. 금당 한 채와 탑 1기가 짝을 이룬 백제지역의 '일탑일금당' 배치 방식이나, 고구려 지역 '일탑 삼금당'은 탑의 비중이 컸던 시기 사찰 배치 방식이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전 앞에 탑 두 개가 세워졌다. 경주 감은사의 동서 삼층석탑이나 불국사 대웅전 앞의 다보탑과 석가탑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보다 탑에 비해 불전의 비중이 커진 것으로 해석한다. 조금 더 후대가 되면 불전에서 탑이 멀어지다가, 아예 주불전 권역 밖에 세워지기도 한다.


보림사 삼층석탑은 1933년 겨울 도굴단에 의해 사리 절도 미수를 겪고 이듬해 보수됐다. 보수 당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870년에 탑을 세우고 891년 사리가 봉안됐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탑에서 불전으로 상징의 무게 중심이 변하는 시기의 문화유산이다.


 석탑의 비례와 가공기법, 세부 구성 모두 비슷한 시기의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유사하다. 두 탑 모두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양식이다. 이중기단과 탑신부, 옥개부, 상륜부 같은 세부 구성이 잘 나타나 있고,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됐다.   


삼층석탑 사이 석등도 완벽에 가까운 황금비를 보이는 통일신라 절정기의 솜씨다.

석등은 불전 앞을 밝히는 조명 구실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부처에 대한 빛의 공양을 상징한다고 풀이된다. 보림사 석등은 손상 없이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한 전형양식으로 장식성이 풍부하고 비례가 잘 맞아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보림사 부도와 승탑비 (2021.11.장흥)


부도와 승탑비

 

답사하던 중 친분 있는 어느 주지스님의 권유로 부도와 승탑비도 봤다. 부도는 승탑이라고도 하는데,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선종 사찰과 승려들 사이에는 특히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선종 사찰 전통이 오래된 절에 가면 반드시 승탑을 따로 모신 구역이 있는데 이를 부도밭으로 부르기도 한다. 보림사에도 한쪽에 부도밭이 조성되어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은 다른 석조물과 같이 통일신라 후기의 팔각 원당형이다. 부식되고 깨진 부위가 있지만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탑비는 부도와 쌍을 이루며 만든 석조물이다. 부도에 모신 승려의 행적을 기록한다.

거북 등에 태워 비석을 세우고 머리에 용트림 형상을 올렸다해서 귀부이수비로 불린다.

당시로선 최상의 기술인력을 투입해 만든 극강의 작품이다. 스승을 향한 극진한 정성이 묻어난다.   

 

보림사 수각 (2021. 11. 장흥)


천년고찰의 위안


보림사 대웅보전 앞마당 한 구석에 눈에 띄는 구조물이 있다. 식수로 사용할 지하수를 뽑아 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설치한 수각이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마당 한 구석으로 끌어내서 근사한 샘터를 조성한 아이디어가 빛난다.

정성 들여 쌓은 석축과 미니화단이 어우러져 밋밋한 마당 한가운데 생기를 불어넣는다.



나는 보림사에 각별한 추억이 있다. 이 절 대웅보전을 보수하러 처음왔던 9년 전 나는 이 품 넓은 사찰에서 깊은 위안을 얻었다. 당시 나는 학생시절 시작해 20년을 쏟아부었던 일을 접고, 한옥목수로 떠돌며 삶의 파란만장을 이제 막, 아주 깊게 맛보던 때였다.

대웅보전 2층 지붕 서까래와 추녀 보수는 오래 걸리지 않아 체류기간은 짧았어도 그 일주일이 힘이 됐다. 2월 초 포근한 남도 햇살, 선배 목수들의 따뜻한 배려, 장흥 탐진강변의 소담한 풍경도 모두 달콤한 휴식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영광과 굴욕이 교차했던 흥망성쇠의 1천년 역사를 보내고 여전히 살아남아 무심하게 방문객을 품는 보림사의 아늑함과 천년고찰의 기품에서 나는 위로 받았다.

새삼 인류 문화유산의 힘과 가치를 느낀다.


보림사 전면 담장. (2021. 11. 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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