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용호정
지난 연말 나는 멋진 정자 건물을 세 채씩이나 봤다. 장흥 부산면에 소재한 용호정, 경호정, 부춘정.
이 건물들은 조선후기 양식의 전형적인 호남형 정자인데 각각의 개성도 뚜렷하다. 나는 여러면에서 흥미롭고 즐거운 자극을 받았다.
그런데 이 뜻밖의 ‘정자탐방’은 지난 연말 끝난 한옥 리모델링 공사의 건축주 덕분이다.
어머니가 기거하시는 고향집의 보수를 맡긴 아들은 작업 틈틈이 나를 데리고 나가 마을과 인근 경승지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구경시켰다.
덕분에 그간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온 블로그를 다시 시작할 감흥이 생긴 나로선 고마운 마음이다.
공사 중이던 당시 나는 마음이 바빠 차분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고 후속답사를 기약했었다.
그러던 중 추위가 잠시 누그러진 날씨를 틈타 이틀 전 다시 가서 세 건물을 보고 왔다.
이번엔 가까이 지내는 동네 어느 선생님과 형님이 동행했다. 서울과 광주에서 퇴직한 두분도 고향의 이 격조있는 건축을 처음 보셨다.
미니멀리즘
정자 건축은 일반 주택건물과는 다르다. 주택은 사람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니 주택은 의식주관련 필수 기능을 갖춰야 한다.
반면 정자는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과 교류의 장소로 쓰였다.
정자의 특별한 쓰임새는 입지와 평면에 반영되고, 정자가 다른 건축과 구분되는 특징을 갖게 한다.
그래서 많은 정자들이 경관이 탁월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너른 마루와 두세평 남짓 작은 온돌방이 짝을 이룬 간략한 구조다.
위 사진의 '용호정'도 탐진강 상류 강안 절벽위 비경을 차지해 지었고, 방 하나에 사면으로 마루를 두른 미니멀한 구조다.
물론 정자에도 크기나 평면 구성에 따라 종류가 많다. 4각 6각 8각 형태 평면에 마루만 깔아놓은 사모정, 육모정, 팔모정이 가장 흔하다.
이런 다각형 평면의 모정에는 드물게 하층 온돌방, 상층 마루방을 구성한 복층의 고급격식도 있다. 경복궁 후원 연못 '향원지'에 만든 '향원정'은 고급 정자의 정점을 보이는 사례다.
그러나 실(방)과 마루를 층으로 구분하지 않고 한 평면에 연접해 배치한 정자가 더 일반적이다. 복층 구조보다 실용적이어선지 조선 사대부들은 이런 정자를 많이 지었다.
남도의 정자건축
그런데 방과 마루를 겸비한 정자라도 영남과 호남지역에 따라 평면형태가 확연히 다르다.
영남지역 정자가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으로 방을 들인 형태라면 호남지역 정자는 네모진 마루바닥 중앙에서 약간 뒤로 밀어 온돌방을 둔 것이다.
당연히 그 배경이 궁금해지는데, 아쉽게도 건축역사학계조차 아직 만족스런 답을 못 찾은 듯하다.
조선 후기에 지은 용호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 평면이다. 평면을 따른 사모지붕에 절병통을 올려 마감했다.
창방과 장여사이 소로를 얹은 소로수장 형태이며, 기둥 상부에 화려한 익공장식 없이 보아지 외단을 직절해 치장을 억제한 외관이다.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선과 자연석 기단의 꾸밈없는 질감이 조화를 이뤄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절제된 멋이 난다.
지난 12월 초에 처음 갔을 때 가이드를 해준 젊은 건축주가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살펴본 일이 있었다.
알고보니, 목재 보호를 위해 마루에 바른 콩기름 냄새였다. 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에 주기적인 건물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퇴락한 곳 없이 건물이 건실하니 보는 사람 기분도 더없이 흡족했다.
정자건물 같은 작은 평면구조의 건물은 지붕 추녀를 거치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전측면 2칸 구조인 용호정은 전측면 중앙기둥에 홍예보를 걸고 그 상부에 'ㅍ'자 틀을 만든후 추녀를 걸었다.
용호정 바깥 기둥은 보기 드물게 참나무를 원기둥으로 깎아 세웠다.
절벽위 바위들 사이 협소한 터에 대지를 닦았으니 공간 제약이 컸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정면 마루는 넓게 측면은 그보다 좁게, 배면은 보행만 가능할 너비로 돌렸다.
배면 마루 밑으로 함실아궁이가 보인다. 정자에서 음식조리는 불필요하니 부뚜막은 만들지 않는다.
필자의 블로그에 게재된 글임.
남도 옛집 구경1. 장흥 정자들(①용호정)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