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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Nov 23. 2021

안방_ 집의 컨트롤타워

장흥 죽헌 고택 안채




집도 사람처럼 스펙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소개받거나 처음 만날 때면 흔히 그의 스펙을 듣게 된다. 그런데 상대가 사회 초년생이면 역량을 짐작해 볼 경험 자체가 부족할 테니 스펙을 참고해야겠지만, 나이 좀 먹으면 얘기가 다르다. 그때부턴 지나 온 세월 동안 훈련이나 자기 계발로 쌓은 역량과 그 퀄리티가 중요하다. 또, 겪어보면 스펙이 전하는 정보는 의외로 빈약하다는 사실도 쉽게 드러난다.

집도 비슷한 면이 있다. 건축적 가치가 높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됐다고 다 멋지고 볼 게 많은 건 아니다.

9년쯤 전에 나는 봉정사 극락전을 보려고 안동 깊은 산골짜기까지 갔다가 좀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국보로 지정된 고려 말기 건물 중 건축시기가 제일 앞서고, 현존 국내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이 건물은 특히 후대와 구별되는 이른 시기의 건축양식을 보여 학술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당시 나도 통일신라 기법이라는 집의 짜임이 지금의 한옥과는 전혀 달라 신기했다. 그런데 딱 그거뿐이었다. 다른 재미는 별로 없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 자체는 더 볼 게 없었다. 내가 만약 전통건축에 반쯤 눈먼 한옥 목수가 아닌 '정상인'의 눈으로 봉정사 극락전을 봤다면 아무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지정 등급은 낮지만 오히려 알맹이 꽉 차고 볼거리 풍성한 문화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이 문화재들의 상당수는 단지 비슷한 사례가 많거나, 아직은 건축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덜 주목받고 있을 뿐이다. 그중 어떤 것은 새로운 가치가 재조명되면, 높은 등급의 문화재로 다시 지정되기도 한다.   

장흥 죽헌 고택도 그럴 거 같다. 이 집은 지방문화재지만 조선 후기 양반가 건축의 세부 구성 요소가 잘 남아 있고, 옛 농촌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흥밋거리도 많다. 특히, 20세기 초중반 전라도 상류주택의 건축기법이 잘 나타나서 수십 년 이내에 문화재 지정등급 상향조정도 기대할 만하다.

   

장흥 죽헌 고택 솟을대문(2021.11. 장흥)


문화재 명칭인 '장흥 죽헌 고택'은 집주인의 선조인 죽헌 위계창(1861-1943)의 호를 땄다.

고택에는 안채, 사랑채, 곳간, 대문, 사당까지 다섯 채의 건물이 있다. 집을 이루는 각 건물들과 전체 내부구조가 원형대로 잘 보존된 것이 문화재 지정 당시 높이 평가됐다. 죽헌 고택에서 가장 눈여겨볼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다. 이중 사랑채는 1919년 죽헌 선생이, 안채는 그 아드님이 1940년대에 신축했다.

이 집은 바깥 풍경도 아름답다. 안방 문을 열고 앉으면 마을 앞 들판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천관산 정상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관산은 문화재청이 2021년 3월 '명승'으로 지정한 남도의 명산이다. 

집이 자리한 언덕 주위로는 팽나무와 대나무 숲, 오래 묵은 수목들이 병풍처럼 둘러 집을 감싸고 있다. 집 안 곳곳에는 자연스럽게 배치된 크고 작은 축대, 나무, 풀꽃들이 주위 경관과 어우러지며 건물과 조화를 이룬다. 안 꾸민 듯 잘 꾸며진 천연스러운 죽헌 고택의 정원은 지난봄 '한국 민가정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대문채
 

대문채는 기둥 네 개를 세운 '사주문'에 앞뒤로만 지붕을 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문 양 옆으로 기둥보다 낮게 흙과 돌로 쌓은 토석 담장이 이어진다. 

보통 사주문을 평지에 만들 때는 앞 기둥 두 개를 담장 밖으로 돌출시켜 세우고 담장을 대문채 측면 중앙에서 이어간다. 이렇게 하면 전후 기둥 중앙에 문짝이 달리게 된다. 이 집은 언덕 경사지에 자리 잡아 사주문 바깥 기둥 열에 담장 선을 맞춰 안정감을 얻었다. 문짝도 대문채의 측면 중앙이 아닌 사주문 바깥 기둥 열에 달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직 방향으로 안채가 보인다. 이 중심선을 기준으로 왼쪽 아래에 사랑채 구역이 있고, 안채의 오른쪽 뒤에 사당이 있다. 곳간채는 안채 왼편에 구획한 별도의 마당에 지었다.

대문에서 안마당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 위에 좌우로 짧은 담장이 보인다. 이 담장의 위치와 크기는 세심하게 계산된 것이다. 대문을 들어선 사람의 시선에서 안채의 안방과 정지(부엌) 쪽을 가리고 있다. 외부인의 사랑채 방문 시 집안 여성들의 사생활 보호 기능을 갖는 '내외 담'이다.     

 

죽헌 고택 안채 (2021.11. 장흥)


안채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많은 'ㅡ'자형 건물이다. 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만들고 건물을 올렸다. 큰 건물 규모에 비례감을 잃지 않도록 기단을 충분히 높인 덕분에 집이 당당하다. 

기단을 자세히 보면, 맨 윗돌인 '기단 갑석'이 다른 돌과 다르게 다듬은 '장대석'이다. 조선 초기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아 국보로 지정된 인근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의 기단이 이와 비슷하게 자연석을 쌓고 위에 장대석을 올려 마감했다. 답사 당시 안내를 해주신 주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걸 보고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하셨다. 실제로 전국의 고택들을 보면 같은 지역 내 건물들끼리 건축기법이나 장식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건물은 전면 6칸에 측면 2칸인 '겹집'이다. 측면에서 볼 때 앞뒤로 두 칸인 집을 겹집이라 하는데 측면 한 칸인 '홑집'보다 격이 높다. 기후가 온난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홑집이 많았었다.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부농들이 생활편의를 위해 겹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고택들은 대부분 죽헌 고택처럼 겹집이다. 홑집보다 방이 넓어진 겹집은 가운데 미닫이 문을 설치해 상하로 방을 나눠 사용하기도 한다.     

안채


안채 각 칸의 용도는 먼저 맨 왼쪽 두 칸이 정지(부엌)와 광이다. 정지에는 방에 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드는 부뚜막 아궁이가 있고, 조리한 음식을 보관하는 장소도 만들어져 있다. 연기가 잘 나가도록 벽에 살창을 냈고, 판문을 달았다. 정지 아궁이에 접한 세 번째 칸이 안방이다. 

안방 오른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칸은 하나로 합쳐진 대청 마루다. 대청마루는 여름철 생활공간이자 집안 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밖에서 언뜻 보기에는 똑같은 세살문이 달려있어 다른 방과 구분되지 않지만, 마루 밑에 구들을 넣지 않아 집 뒤안과 통해 있다. 여름철이면 집 뒤 숲에서 마당 쪽으로 이 통로를 타고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이처럼 문이 설치된 마루방을 '마리' 또는 '마래'라고 하는데, 전라도 해안지방의 특징적인 공간이다. 집에 따라 곡식이나 음식 보관소 등 다용도로 쓰였다.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집에서도 어머니께서 설날 음식을 만들어 보관하시곤 했는데, 여기를 '말래'라 불렀다. 

맨 오른쪽 건넛방은 남성이 사용하는 방이다. 별도의 아궁이가 설치되고 방은 상하로 나뉜다. 


죽헌 고택 안방에서 눈곱 째기 창으로 보이는 대문간과 사랑채 (2021.11. 장흥)


눈곱 째기 창


총 다섯 채의 건물로 이뤄진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당연히 주인 내외가 거주하는 안채다. 다른 건물들은 모두 안채를 중심에 두고 각각의 동선을 고려해 배치됐다.

안채에서도 특히 안방은 집안일을 지휘 감독하는 안주인의 거처로 집 전체의 중심 공간이다. 

죽헌 고택 안방 문에는 집의 컨트롤 타워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있다. 영창에 내놓은 '눈곱 째기 창'이다. 방한 단열을 고려한 겹창 구조인 안방 창호는 바깥쪽에 여닫이 쌍창을 하고 실내 쪽으로 미닫이 영창을 했다. 보통 영창은 채광 간섭을 줄이기 위해 살의 간격이 넓고 개수가 적은 완자나 만 자살을 설치한다. 이 집 영창도 변형된 완자살을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창의 하부에서 문양 한 칸을 다른 것 보다 크게 만들고, 한지 대신 유리를 끼워 바깥이 보이도록 설치했다. 이처럼 문을 열지 않고 바깥을 살필 수 있게 창 속에 다시 작은 창을 낸 것을 '눈곱 째기 창'이라 한다. 

두 개가 쌍을 이룬 죽헌 고택 눈곱 째기 창은 특정한 두 장소를 각각 보여준다. 대문에서 안채로 올라오는 계단과 사랑채에서 안채로 올라오는 길. 즉, 손님이나 사랑채의 움직임을 살피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안방은 지금으로 치면 CCTV 화면을 띄워 보는 상황실 같은 곳이기도 했다. 

집주인의 호의로 안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내다보니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 눈곱 째기 창은 안방에 앉은 사람의 시선 높이를 측정해 창호 제작 전에 미리 설계해서 만든 것 같다.

민간 주택에 유리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 일이다. 기존 한지를 바른 눈곱 째기 창과 달리 이처럼 유리를 끼운 것은 이전 시기 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변화였다.      


정지(부엌)와 굴뚝


장흥 죽헌 고택의 정지(부엌)와 굴뚝 (2021. 11. 장흥)

   

안방과 세트로 붙어있는 정지(부엌)는 주택에서 또 하나의 필수 공간이다. 정지는 난방과 음식 조리가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다. 서민의 민가는 방과 정지만으로 간략히 구성된 예가 많았지만, 상류층의 반가 건축은 죽헌 고택처럼 안방의 한쪽이 대청마루면 다른 한쪽이 정지가 되고, 안방을 중심으로 세 곳이 연결된다. 

그런데 온돌방, 부엌, 대청마루를 한 건물에 다 갖춘 주거형태의 등장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온돌방과 마루방은 오랜 세월 동안 각자 따로 있던 건축이었다. 온돌은 같은 건축 문화권인 중국, 일본에 없는 한반도의 독특한 난방방식으로 선사시대 유적의 줄 구들이 초기 형태다. 마루방도 삼국시대 유물 등 사례가 많다. 옛 가야지역에서 나온 토기 중 바닥에 마루를 깐 누각 모형도 같은 예다.   

한반도 북쪽 추운 지방의 온돌과 고온 다습한 지역의 마루가 한 건물 안에서 합쳐져 독특한 한국 주택문화를 이룬 것은 대략 12c에서 14c에 생긴 일로 본다. 그전까지는 음식 조리공간이 별도 건물에 따로 있거나, 주택 안에 있더라도 난방과 분리됐다. 난방을 위해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실외에 별도로 있었다.

구들은 방바닥보다 낮게 땅을 파서 불기가 지나는 통로를 만든 다음 부엌에서 불을 넣고 굴뚝은 집 밖에 설치해 연기가 빠져나가게 했다. 장흥 죽헌 고택의 구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궁이에는 가마솥을 걸고 난방에 사용된 열기로 음식을 조리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음식에  같은 오래 끓이는 요리가 많은 것을 온돌문화의 영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죽헌 고택의 굴뚝은 붉은 벽돌로 높게 쌓아 올려 한껏 멋을 냈다. 마치 경복궁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이나 대왕대비의 거처인 자경전 십장생 굴뚝을 떠오르게 한다. 굴뚝 상부에는 기와를 구워 만든 '연가'라는 지붕을 설치해서 빗물을 가리며 치장했고, 그 밑에 우아한 자태의 학이 장식되어 있다. 

조선 후기 반가 건축에서는 궁궐을 제외하고 이만한 규모로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굴뚝은 흔치 않았다. 1900년대에 부를 축적한 지방 부호들의 집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으로 보인다.           



화려한 조각과 치목기법


죽헌 고택에서 방에서 보이는 천관산 정상 (2021.11. 장흥)



장흥 죽헌 고택 안채를 지을 당시 건축주는 재정여력이 넉넉했던 것 같다. 사용된 목재의 규격이 크고, 집 규모가 장대하며, 목재의 세부 가공이나 짜임에 공을 많이 들였다. 죽헌 고택 현재 주인도 당시 할아버지께서 간척사업으로 큰돈을 버셔서 지은 집이라고 귀띔하셨다.

주인 말씀으로는 인근 솜씨 좋은 어느 목수가 이 동네 집들을 도맡아 지었는데 안채도 그분이 작업하셨다. 그래선지 이 동네에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 중 여러 곳에서 비슷한 기법이 보인다. 이 집 서까래 깎은 솜씨도 그중 하나다. 

서까래는 지붕 무게에 따라 굵기가 달라진다. 집이 작으면 가늘게 쓰고, 이 고택처럼 집이 크면 지붕 위에 얹는 흙과 기와의 무게도 늘어나니 이를 감당하도록 굵은 목재를 쓴다. 문제는 굵은 서까래의 뭉툭한 끝부분을 그대로 두면 처마 끝이 답답해 보이는 것이다. 이때 하는 서까래 '소매 걷이' 기법은 서까래 끝을 살짝 다듬어 지붕 끝선이 날렵해 보이도록 만드는 전통 치목 기법이다.

그런데 이 집에 사용된 소매 걷이 기법은 문화재 보수현장에서 하는 일반적인 방법과 많이 다르다. 

보통 기둥밖에 나온 서까래 끄트머리 1/3 지점에서부터 줄여 깎아 끝 단면을 기둥 쪽보다 약간 작게 한다.

이 건물 소매 걷이는 기둥 위치에서부터 전체적으로 확연히 줄여 깎아서 전혀 다른 미감을 낸다. 이 마을에 있는 다른 고택들에서도 같은 기법이 쓰였다. 

물론, 다르다고 틀리지 않다. 구조적 결함이 아니면 다양한 기법은 그 자체로 보존될 가치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목수 기문에 따른 기법 차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월이 지나 후대에 이 건물을 보수한다면 아마도 여기 있는 기법을 원형으로 삼고 그대로 보수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저 토록 아름답게 일일이 서까래를 깎아 내려면 훨씬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덕분에 처마 끝이 더없이 사뿐해 보인다. 

안채 문틀 위 기둥 옆에 끼운 조각 장식 판재는 굴뚝 꼭대기 학 장식만큼이나 감탄스럽다. 

얇은 판재를 양각해서 학, 나비, 글자 등을 새겨 놓았는데 그림과 조각 솜씨가 조잡하지 않고 세련되며 생동감 있다.   

 이전 시기 주택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고급 장식이다. 이 시기 작업도구 발달에 따른 변화가 아닐까 짐작한다.   

         


죽헌고택 안채의 화려한 조각 장식 (2021. 11. 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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