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전직 미국 대통령 닉슨은 불명예스러운 사임 이후 프로스트라는 토크쇼 진행자와 인터뷰를 가진다.
이 인터뷰가 영화로까지 제작될만큼 유명한 이유는 닉슨의 솔직한 발언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할 일도 없고, 자서전에 쓸 일도 없으며, 이 인터뷰가 아니었으면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발언들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이나 군사쿠데타에 대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솔직한 대답을 한 것과 비슷할 것이다.
닉슨은 "대통령은 때로는 국익을 위해 불법적인 일을 해야 하며, 대통령이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라고 할 수 없다." 같은 말을 했는데, 이 말을 5.18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했다고 상상해보자. 논란을 일으킬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같은 발언은 할 수 있는 최악의 자충수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닉슨은 대체 어쩌다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걸까? 닉슨은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수 없이 많은 인터뷰 경험이 있다.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말을 자연스럽게 빙빙 돌릴 수도 있었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었다는 식의 답변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닉슨은 그 모든 선택지를 뒤로하고 파격적으로 솔직한 답변을 했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그 이유들을 한 번 찾아보자.
우선, 나는 닉슨과 프로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당연히 영화가 얼마나 팩트를 기반으로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영화를 기반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그러므로 팩트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할 것 같다.
닉슨을 인터뷰한 프로스트는 정치나 시사 전문가라기보다는 토크쇼 엠씨에 가까웠다. 흔히 거물 정치인을 심층 인터뷰한다고 생각하면 손석희 앵커나 김어준 같은 사람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갑작스럽게 유재석이나 이용진이 정치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그간의 행보를 봤을 때 손석희나 김어준 보다는 유재석이나 이용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손석희나 김어준이 인터뷰를 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긴장하고 어느정도 방어적이고 정형화된 태도를 보이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제까지 개그맨과 여배우를 불러 인터뷰하던 예능엠씨가 인터뷰를 하면 정치적인 태도를 좀 더 내려놓게 될 것이다.
토크쇼 엠씨는 정치 전문가들과 다르게 대중적인 시각에서 질문을 하고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답변을 기대한다. 정치 전문가라면 닉슨의 솔직한 마음을 끌어낼만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궁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정치적 입장과 그에 따른 결과 혹은 숨겨진 비화 등이 더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닉슨의 솔직한 심경이 더 궁금했고, 토크쇼 엠씨는 그런 대중의 니즈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토크쇼 엠씨가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해도 결국은 닉슨이 대답할 마음이 없으면 얼마든지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분위기가 편하기 때문에 더 쉽게 대답을 피할 수 있다. 실제로 닉슨은 인터뷰 초반에는 말을 빙빙 돌리며 프로스트가 원하는 대답을 전혀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뷰 후반부에 닉슨은 프로스트가 기대하던 솔직한 답변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호혜성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호의를 받았으면 호의를 돌려주고자 하는 본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프로스트의 닉슨 인터뷰는 4차례에 걸쳐 진행됬는데, 처음 3번의 인터뷰는 닉슨의 긍정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외관계나 외교정책 등에 많이 할애되었다. 닉슨이 처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프로스트는 닉슨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호의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닉슨에게는 마음의 빚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본인은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거절했음에도 상대는 호의를 베풀어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빚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결국 프로스트의 장단에 발을 맞춰준 데에는 이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닉슨이 프로스트의 개인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일례로, 인터뷰 섭외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프로스트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닉슨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간파한다. 사실 닉슨 입장에서는 인터뷰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던 기업의 투자를 받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프로스트의 진지함이나 부담을 내포하는 그러므로 인터뷰의 성격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질문은 닉슨의 치밀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치 닉슨이 프로스트가 자신의 명운을 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됨으로서 인터뷰를 좀 더 의미 있게 진행해야 한다는 마음을 공감한 듯한 모습이 되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닉슨의 치밀함 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보여주는 포인트이기도 한 것이다.
닉슨이 프로스트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인터뷰 전날 밤에 뜬금 없이 닉슨이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다.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고 영화적 각색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 전화에서 닉슨은 프로스트에게 자신의 개인사를 터놓으면서 '이건 결투고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골로 간다.' 같은 말을 하는데 만약 닉슨이 정말 프로스트를 골로 보내버리고 싶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정말 골로 보내고 싶었다면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하는 것이 낫지, '내가 공격을 할테니 준비해라'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닉슨은 인터뷰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더 의미 있는 인터뷰가 나오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 하다.
결국 닉슨 자신도 어느정도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정치적 입장에 매몰되지 않은 프로스트는 그러한 이야기를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절반 이상의 분량을 통해 업적을 조명하는 호의를 베풀었고, 자신의 돈과 커리어를 걸고 열성을 다해 인터뷰에 임하는 프로스트의 입장에 공감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프로스트의 닉슨 인터뷰는 결과적으로 윈윈이라고 평가받는다. 인터뷰는 대박이 났고 프로스트는 이 인터뷰 이후로 저널리스트로서 입지를 넓혔으며, 닉슨은 흑막을 걷어내고 재평가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닉슨의 입장에서는 이미 썩은물을 입 안에 가득 물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썩은 물을 계속 물고 있어봤자 힘들기만 하다. 이 인터뷰는 즐겁진 않더라도 썩은물을 삼키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당시 정치 상황을 잘 몰라서 닉슨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정치적 입장에서나 닉슨의 평판이나 법적인 입장에서는 모른다. 다만 심리적으로는 개운했을 것이다. 그를 비난할 사람들은 어차피 인터뷰 이전부터 이미 비난하고 있었을 것이고, 인터뷰를 통해 그를 좀 더 이해하게 된 사람들도 생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