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019. 베트남 독립기념일, 베트남 사람들에게 독립기념일이란..
베트남 생활 2년차, 외국인으로서 베트남은 살면 살수록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스즈키컵 축구 경기 첫 대회 우승날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부대로 인해 차를 잡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왔던 기억, 박항서 감독이 영웅으로 급부상하며 나를 보며 박항서 감독 얘기를 하는 사람들, 심지어 한국 사람이란 이유로 택시기사에게 선물이라며 사탕을 받았던 일, 우기 때 도로에 불어난 빗물로 택시안에서 몇 시간을 있기도했었고, 며칠 전엔 전구 공장의 대형 화재로 수은이 유출된 사건 (화재 관련 조사와 수은 처리 문제는 아직도 진행중이고 출입금지 지역은 우리 아파트에선 불과 600M 정도 떨어져있다.)도 있었다. 이 곳에서 나는 두 번째 '베트남 독립기념일'을 맞았다.
2019년 9월 2일은 베트남이 독립선언을 한 지 74주년이 되는 해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우리 가족은 74년 전 호찌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바딘광장과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이 잠들어 있는 호찌민 묘소를 찾았다. 오전 8시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자신들의 영웅을 보러 온 베트남 사람들로 묘소로 들어가는 광장앞 좁은 인도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광장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아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행렬에, 날씨까지 더워 잠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새벽부터 서둘러 온 게 아까워 조금 서 있다보니 생각보다 우리 차례가 빨리 다가왔다.
엄중하고 삼엄한 공안들의 관리하에 드디어 관에 안치되어 있는 호치민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촬영 금지, 멈춰서 구경하지 말 것, 같은 철칙이 있었지만 키가 작은 아이들은 한 단 높은 앞줄에 세워 영웅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하는 배려도 있었다.
나는 독립기념일엔 다양한 기념행사도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갔으나 행사가 열리는 시간은 아침 6시와 저녁 9시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뗏 (음력 1월 1일)을 제외하곤 거의 유일한 공휴일인 독립기념일. 그 만큼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찌민과 이 날은 특별하다. 암울했던 식민 노예통치생활, 그 시작은 1516년 베트남 다낭에 포르투갈인이 상륙하면서다. 그들은 베트남에 가톨릭 신앙을 베트남에 들여왔고, 그로부터 몇 세기 후 베트남의 고위관료들은 자신들의 유교가 위협받을까,선교사와 개종자들을 처형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이 사건을 꼬투리삼아 다낭을 비롯한 해안의 몇몇 도시를 공격하며, 프랑스의 베트남 정복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일본도 가세했다.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이기 전인 1940년 9월, 베트남에 진출한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포함하여 라오스,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아 베트남에 주둔중이었다)
태평양 전쟁 기간동안 일본은, 베트남을 동남아 지역을 침략하는 자신들의 전진기기로 만들어 베트남에서 군수품을 조달했다. 베트남 국민의 식량마저 가져가 1945년 전쟁 말기에는 2백만명의 아사자가 생길 정도였단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며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군의 주요군수기지였던 베트남과 한국은 일본군의 존재로 분단의 역사를 맞는다.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것이 꿈이었던 호찌민은 베트남 꼭두각시였던 황제를 설득해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고 스스로 주석에 오른다. 그리고 드디어 1945년 9월,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는 유명한 선언서를 낭독한다.
"이제 우리는 지난 80년 간 프랑스 식민 노예 통치생활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선포한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의 권리가 있으며, 이미 그 권리들을 획득했다. 모든 베트남인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고귀한 정신을 지켜나갈 것이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만방에 알린 순간.
이는 동남아에서 최초로, 한 나라가 세계 만방에
독립과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베트남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 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거쳐야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갈라진데다 제 2차 대전 종전 직후, 독일과의 전쟁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국토를 되찾은 프랑스가 식민지를 독립시키지 않고 베트남을 포함하는 인도차이나내 식민지 권한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한 것. 그렇게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프랑스와 베트남은 베트남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8년 간의 전쟁을 벌였다. 무기와 군대의 수. 모든 면에서 이길 수 없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지만 호찌민을 중신으로 한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프랑스를 상대로 끊임없는 게릴라전을 펼쳐 침략자를 괴롭히고 굴욕을 주었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은 라오스와의 국경부분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배한 후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실제로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강대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자부심은 어마어마하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베트남. 휴일 호찌민 묘소를 찾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외국인인 우리는 베트남 시내 관광 투어에 속해 있는 하나의 관광지 일뿐이지만, 베트남 돈 뿐만 아니라 식당, 공원 등 어디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호찌민의 사진, 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대하는 모습에 절로 숙연해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