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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s Dec 14. 2022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얼마 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재개봉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눈이 살랑살랑 올랑 말랑 하던 요즘 하늘을 봐서 그런가 무언가에 이끌려 순간 예매를 해버렸다.


익숙한 작은 영화관에 들어왔다.


내가 저장해둔 나의 인생작 리스트에는 러브레터가  있었다. 근데 사실 러브레터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았다그저 희미하게 아련하고 애틋했던 감정이 적은 농도로만 남아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래된 낡은 글씨체와 화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하얀 눈 위에 누워 숨을 참고 있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보면서 계속 놀랐던 건, 이와이 슌지가 그려낸 모든 장면이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옛날 영화의 촌스러움은 전혀 없고 고풍스러운 그림 같은 장면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옅게 남아있던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들이 스크린에 걸려 선명하게 다시 내게 각인됐다.

모든 장면들이 나를 다시 애틋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 내 첫사랑에 덮인 나카야마 미호의 모든 표정과 마음을 쫓아 이츠키가 조난당한 산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히로코가 산을 보고 외치는 장면을 마주한다.  

설원에서 ‘오겡기데스까’를 외치던 이 장면은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들을 부수고 가장 깊고 아프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순식간에 끌어올렸다.


‘잘 지내?’ ‘잘 지내’ 사랑하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 더 넘어 사랑할 사람 모두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자 궁금한 말이자 가장 어려운 말이 아닐까 싶다. 구구절절, 속에서 그녀에게 몰래 혼자 말 걸고 대답하던 모든 문장들은 사실 '잘 지내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는 '보고 싶다'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카야마 미호의 점점 더 감정 깊게 외치면서 우는 장면에서 2시간가량 쌓여있던 뭉클뭉클한 감정들이 다 터져 나왔다.  

한 바탕, 나도 몇 줄기 뽑아내고서야 개운하게 다음 장면을 이어볼 수 있었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사랑이 아닌, 은근슬쩍 곳곳에 스며들던 순하고 맑은 깨끗한 사랑은 여전히 장면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잊은 듯, 희미한 듯, 정확히 규정할 수 없이, 잊은 듯 살고 있었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꼭 너를 닮은 사람이었구나.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구나.  

 

마지막, 도서반납 카드 뒤편에 그려진 너의 모습은.

나의 처음 사랑이자 내 모든 사랑의 기원이 된 너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만 잘 지내는 줄로 믿고 있다.

뭐가 그렇게 예뻤을까. 뭐가 그리 좋아서 너를 보고 웃고 있었나.  

그렇게 예뻤고, 그렇게 웃음이 났다.

‘너’를 닮았단 것만으로도 사랑을 해보기에 충분할 만큼.


한 동안 추억에 잠겨 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다가

한 동안 잊고 있던 이 영화를 선명하게 다시 바라보니

왜 그렇게 그런 영화들이 좋았을까.

내가 좋아하던 영화들이 사실 ‘러브레터’를 닮은 영화들이었구나.

나는 ‘러브레터’를 닮은 영화들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지만 한 번도 이 영화를 잊은 적이 없었구나.


나의 기준. 나의 마음 한가운데 가장 농도 짙게 이어 그려지고 있던


나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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