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랜Jina May 31. 2024

쉿!! 비밀리에 받는 미국의 상문화

한국에만 오면 미국의 생활은 일시 정지상태로 돌입한다.


미국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심지어 내가 아이들과 남편이 있는 가정주부인지도 잠시 잊고 있다면 거짓말일까? 한국에 오기 전 심은 상추와 호박 그리고 고추는 제대로 잘 자라고 있는지 정말 까마득히 먼 이야기로 어느덧 3주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 일주일 후면 이 그리운 한국을 떠나야 하는 딱 이 시점에 드디어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미국이라는 곳이 떠올려진 이유는 한 통의 메일을 받고서부터였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이슈는 30년 만에 양육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늦둥이를 낳은 불운(?)으로 남들보다 늦은 해방이기에 더욱 뜻깊었던 이유인데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고 기르고 했던 시간이 어느덧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막내가 대학을 들어가는 이 시점, 그러니까 만으로 18세가 되는 해까지 엄마의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물론 대학을 가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고 앞으로 더 많은 일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익히 보고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대학 이후의 삶은 일단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관문은 성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해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심어 주어야 한다.


말이 길어지는데 중요한 메일 이야기를 해야겠다.


막내아들 고등학교에서 온 메일인데 졸업식 전에 상을 받을 예정이니 언제까지 그리고 몇 시까지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자리가 많지 않으니 부모님 이외에 형제자매가 온다면 미리 알려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보통 졸업식 날 모든 졸업생 앞에서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상을 받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한국문화를 35년 겪어온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사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식이 한국처럼 대단히 치러지지 않는 점도 특이하다. 물론 주마다 그 행사도 다를 수 있겠으나 내가 겪어본 초중 졸업식은 그다지 크게 상을 주고받거나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남긴다거나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집에서 입는 차림으로 학교 마지막 날을 함께 한다는 정도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식은 다르다. 카운티 전체가 한 장소에서 모든 고등학교 졸업식을 진행하는데 학교마다 제비 뽑기를 해서 시간별로 다르게 졸업식을 치른다. 졸업식 날은 온 가족이 모이기 때문에 모두가 참석할 수는 없고 학생당 3, 4개의 티켓을 주고 더 이상은 참석하지 못하게 인원 제한을 한다. 한국처럼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서 인생의 마지막 졸업식이 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고등학교 졸업식을 성대히 치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대하게 치러지는 고등학교 졸업식은 마치 대학교 졸업처럼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는다. 학교마다 매년 졸업가운의 색깔이 달라지면서 졸업 연도를 기억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졸업식은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기품으로 시작되고 밴드의 우렁찬 기운으로 졸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가족은 그들의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졸업을 기뻐하며 즐기게 된다.

전광판으로 졸업장을 받는 모습


이때 상은 빠져있다. 


우수한 아이들은 졸업 전에 상을 받고 이미 가족의 축하를 받아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상을 받으러 오라는 메일을 며칠 전에 받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상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막내 위로 두 아이를 키운 전력으로 아주 대략적인 상은 알고 있다. 한국처럼 학교장상부터 교육감상이라던지 깨알 같은 클럽 상이라던지 각종 상을 준다. 특히 각종 기부금 같은 돈으로 받는 스칼라스틱 상은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을 갖게 되는 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음식점이나 보험회사, 각종 단체 등 개인이 주는 장학금을 잘 이용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결과는 돈으로 직결된다. 적은 금액에서 큰 금액까지 어떤 내용이나 어떤 기관이나 상관없이 신청하고 그에 맞는 에세이나 인터뷰 후 선정이 되면 대학 등록금에 보탬이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졸업하면서 쓰이는 돈을 충당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즉 부지런하게 손을 놀리면 장학금과 직결될 수 있는 찬스가 바로 고등학교 졸업이다.


졸업식이 이렇게 성대하게 치러지니 각종 상을 전달하며 일일이 호명하며 한 명 한 명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 메릴랜드 같은 경우 한 개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4백 명 안팎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때 한 명 한 명에게 상을 주기에도 벅찬 시간이지만 모두가 모여 축하해 주는 자리에서 특별한 상으로 남들과 비교하는 문화가 아니다 보니 다른 친구들이 보기 전에 미리 상을 준다는 개념인듯하다.


여기에서 잠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해야겠다.


초등학교까지는 학교에서 매년 부모님과 상담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 이때 아이들이 학교생활은 잘하는지 성적은 어떤지 성적표가 가정에 나간 후에 상담 날짜를 정해서 각과목 선생님과 상담을 잡고 만날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중학생이 되어 중요한 영어와 수학 선생님 상담을 요청하고 만났는데 선생님은 대뜸 물었다.


"왜 오셨어요?"

"아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성적표를 보셨나요?"

"네...(선생님의 눈빛에서 왜 왔냐는 귀찮다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앞으로 문제가 없으면 안 오셔도 됩니다"


그 후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심지어 대학 원서를 쓸 때도 누구 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다. 담임제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저 아이가 카운슬러와 잠깐 만나 상의했다는 정도이니 도대체가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무조건 아이의 의견에 맞기는 시스템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사립학교와는 너무도 다른 공립학교 시스템의 한계임도 잊지 말아야겠다.


미국의 조용한 상 문화는 비단 학생들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상에 대한 기대치가 낮게 만드는 조용한 상 문화가 그대로 이어져 어른이 되어서 그들이 남들에게 상을 주는 것 또한 비밀처럼 되어 하나의 문화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상뿐만 아니라 기부하는 문화 또한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누가 누가 더 조용히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를 경쟁이나 하듯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그들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주식 투자의 귀재 워런버핏은 자신의 자선단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빌케이츠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이상한 행동 또한 이러한 유례를 따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성공한 사람들의 자신의 대학 기부가 무명으로 이루어지는 게 다반사고 남들에게 나의 자랑을 숨기는 게 미덕으로 여기게끔 하는 게 바로 이러한 비교 문화에서 벗어나는 교육적 철학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번엔 참석하지 못하지만,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상 시상식에 자리 하나를 양보한다는 의미에서 미안함을 대신해야겠다. 상추가 많이 자랐으려나? 이제야 정신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걸 보면 곧 한국을 떠나야 함을 알리는 신호가 되는듯하다. 그냥 한국에 머물고 싶지만, 쉿!! 내 땅에서 살지 못하는 이민자의 아픔 또한 비밀에 부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