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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수 Jun 10. 2022

도덕경 읽기 2일

반자도지동

「나홀로 읽는 도덕경」_ 최진석 저_ 시공사


<발췌> 

과거의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이들의 사명은 어떻게 새 질서와 새 세계관을 건설하느냐였어요. 이때 뒤틀림으로부터 야기된 주제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명실’ 즉, 이름과 실질 사이의 관계였고요. 

군자가 군자 아닌 듯하고, 소인이 소인 아닌 듯 되어버린 겁니다. 명과 실이 뒤틀린 거죠. 


노자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개념을 분명히 정하고 정의 내려버리면 그 정의가 그 개념을 완전히 가둬버리기 때문에 이 대상의 활동성이 좁아질 뿐 아니라 개념을 확고하게 정하면 정할수록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신념이 강해져서 그것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는 부정적인 현상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노자는 정의를 내리거나 어떤 개념을 정하는 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자율성을 제한함으로써 결국 전체 사회에는 손해가 된다고 말하는 거죠. 길을 정해놓고 그 길로만 다니라고 하는 것보다, 내가 걸어 다니는 곳이 바로 길이라고 생각해야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그래야 사회나 삶이 창의적이고 다채로워져서 생산력이 올라간다고 본 것이죠. (p61~p64) 


인간은 ‘없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새로움’이나 ‘창의’나 ‘창조’ 모두 ‘아직 없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 현실화된 것이죠. 보이고 만져지고 확실히 있는 것만 다룬다면 새로운 이론을 생산해내기 어렵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도 사라져요. 


그러면 노자가 말하는 ‘무’는 무엇일까요?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으면서 기능성과 활동력은 있는 거예요. 즉 경계에 있지만 그것 자체의 실재적 존재성은 없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일이 일어나고 만물이 제대로 생기고 작동하는 거예요. 


‘무’는 마치 시작이나 출발이나 현재처럼 자신의 실재성 존재성은 감추고 있지만, 이 세계를 드러나게 해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요. 노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이 세계가 ‘무’와 ‘유’의 상호의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무상생’이에요. (p67~p69) 


바로 ‘반자도지동’이에요. 도의 작용이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힘이죠. 노자는 반대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이 반대쪽으로 항상 끌리는 경향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노자가 제일 부정적으로 본 것이 구분이에요. 구분이야말로 폭력을 일으키는 주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비본질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준이 태어나는 원점을 붕괴시킵니다. 노자 사상에는 해체주의적인 성격이 있어요.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본질을 긍정하면 언어와 개념을 긍정적으로 보고 신뢰할 수 밖에 없겠죠. 언어와 개념을 너무 믿으면 완강해지기 마련이고, 언어와 개념을 덜 믿으면 유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평적 대화와 소통은 본질론적 태도를 가지면 쉽지 않아요. 그것은 관계론적 태도를 가져야 제대로 가능한 것입니다.  (p71~p73) 


노자에게 ‘유’와 ‘무’는 평등해요. 서로 의존하면서 공존하죠. ‘유’와 ‘무’가 동등한 높이에 있는 것을 노자는 현모하다는 의미에서 ‘현玄’이라고 씁니다. 


노자는 일등을 하려는 사람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탁월함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찌질한 삶을 자처한 사람이 아닙니다. 노자가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말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고저, 장단, 상하처럼 자연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합의된 아름다움이에요. 노자는 아름다움이 특정한 아름다움으로 규정되면 그것이 권력으로 행사되니, 결국 아름다운 태도가 아니라 추한 태도가 된다고 보는 것이죠. 

(p117) 


<단상> 


‘무’에서 생겨나서 ‘유’가 되고 또 ‘유’는 ‘무’로 향하고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무’라는 것이 막연히 비워진 상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안에는 무엇보다 강력한 무한대의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정해진 개념들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런 잣대로 나를 보고 남을 보면서 줄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내가 느끼는 소외감과 피로감이 그렇게 정해져버린 개념과 구분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대중들이 하나의 이슈에 반응하면 나도 그것을 취해야 하고 같은 반응을 보여야 안도감을 느끼는 사회 속에서 합의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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