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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May 05. 2022

신뢰가 있다는 말

세 달 전에 팀장이 되었다.


작년 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대표 L의 물음에 업무 A를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몇 달 뒤 대표는 A에 B, C, D, E를 붙인 팀을 만들고 내가 그 팀을 리드할 거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였다. 관리자는 내 길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기존의 포지션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약해지던 차에 적절한 전환인 것 같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다면 더 무겁게 생각했겠지만, 무식하면 용감하고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기도 한 법.


팀장이 된 지 3주 정도 되었을 무렵, 대표가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내가 헤매고 있는 것 같다며 현황을 짚어보자고 했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피드백을 받았고, 대화가 끝난 후에야 대표가 어떤 의도로 이 팀을 만들었는지 더 순도 높게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사실 아는 것도 아닌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팀의 설립의도는 깨달았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나중에 번복하게 되는 디렉션, 미숙한 매니지먼트, 부족한 실행력이 하나둘 쌓이면서 자괴감이 커져갔다. 솔직히 말하면 실제로 결과물이 좋지 않은 것보다 동료들이 내가 잘 못한다고 생각할까봐 불안했다. 흔히 얘기하는 ‘실무자일 때는 괜찮았는데, 관리자 감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가 코로나에 걸렸다. 팀장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코로나에 걸린 걸 깨달은 순간에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표에게 상태를 이야기하고 2주 동안 회사를 쉬었다. 병원을 알아보다 리뷰가 좋은 병원은 예약하려면 네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일단 멈추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함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신 날 들려준 코카콜라 CEO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은 다섯 가지의 공을 저글링하는 것인데 일, 가족, 친구, 건강, 영적인 것(spirit)이라고 했다. 그중에 네 개는 유리공이고, 하나만 고무공인데 바로 일이라고. 일이란 공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만 나머지 공들은 떨어뜨리면 깨지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라는 공을 깨뜨린 상태였다.


일이 다섯 가지 공 중에 하나일 뿐이고, 고무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왠지 다시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다음날 출근했다. 잘해보자, 잘할 수 있을 거야. 복귀 첫 날, 필수적이진 않지만 하면 좋기는 한 미팅들을 모두 없앴다. 에너지의 70%만 사용하자. 디테일이 떨어지더라도 중요한 일 위주로 하자고 계속 다짐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난 다시 허덕이고 있다. 유리처럼 약한 마음이 다시 깨지려는 조짐이 보인다. 한 번 깨져봤더니 이제 이대로 더 가면 깨질 것을 알겠다.


며칠 전, 몇 개의 미팅을 마치고 자괴감에 휩싸여있다가 팀원 P에게 젤라또를 먹자고 했다. 젤라또는 맛있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P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팀장으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요즘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점에 대해서 토로했다.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런 이야기가 그에게 어떻게 들릴지 따윈 신경쓰지 않은 채, 답답함을 이야기했다.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P 말을 시작했다. 팀원들끼리 따로 만나서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끔씩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어쩐지 모르는 사이에 부쩍 친해진 느낌이더라니).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팀원들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가 있는  같다고. P 본인은 처음에 내가 팀장으로 왔을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같지만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렇다니 다행이네요-라고 말하고 P 헤어졌다.


어제 아침 출근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주차해놓은 곳으로 투벅투벅 걸어가는데 P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나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 처음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생겼다는 . 그래, 그거면 힘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든지 간에, 팀원들이 나를 신뢰한다는데  가봐야되지 않을까.


약한 나는 앞으로 몇 번이고 흔들리겠지만, 우리가 해낼 일들이 궁금해서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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