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담 Mar 24. 2023

엄마가 아픕니다

엄마는 도색 작업을 하는 공장에 다니시다 2010년 유방암 선고를 받으셨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난 후 이웃이 운영하는 공장에 어쩌다 취업을 하게 되어서 가게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산재인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당시 산재 신청을 해서 보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내가 듣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는 엄마는 아무런 보상도 대책도 없이 일터를 떠나야만 했던 것 같다.


지방 병원에서는 처음에 물혹이라고 했지만, 큰 병원에서는 암 판정을 내렸다.

다행히 병이 심각하지 않아 수술이 가능하고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유방 절제술과 만약을 대비한 항암치료를 필요로 했다.


그 때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입원한 엄마를 보러 두어번 갔던 기억이 난다.

퇴원하고 나서는 항암 치료를 앞두고 엄마와 가발과 모자를 사러 갔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니 실제로 머리가 거의 다 빠져버려서 외출을 꺼리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을 때는 가발과 모자를 함께 쓰고 나가셨던 것 같다. 이후엔 쉬는 시간을 가지며 운동도 하고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는 등 건강 회복과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셨다.

 

재취업을 한 일자리는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꽤 일자리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나이들고 병들어 생활이 어려운 어른들의 집에 찾아가 가사 일을 일정 도와주는 일이어서 어떻게 보면 봉사활동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만 같다고 하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은퇴 후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일을 자연스럽게 그만두시게 되었다.


아버지가 벌인 사업은 농사였다. 부부가 초보 농사꾼으로 일하면서 초반에는 농사를 말아먹었다고 할 정도로 당장 수확한 작물이 좋지 않아서 돈을 많이 벌지 못 했다.

고구마, 감자, 배추, 고추, 마늘, 오이 등 아빠는 자꾸만 새로운 작물로 일을 벌였고, 기계를 사용하는 일 외에 수고로운 노동은 거의 대부분 엄마의 몫이었다.

농사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고되다. 그리고 얻는 수익도 그에 비하면 정말 적다. 독한 농약에도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2021년 2월에 엄마는 또 다시 암 판정을 받았다.

이번에는 폐암 4기였다. 평소에 기침도 하지 않는 사람이 폐암 4기라니 가족들 모두 충격에 빠졌다.

추적 검사를 해보니 2010년 판정 받은 유방암에서 유래된 암세포라고 했다. 반가운 첫 손주를 보러 서울에 있는 언니집에 와서 받은 정기 검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이미 척추뼈에 전이가 있었고, 뇌 전이도 조금은 발생한 상태였다.

맞는 치료법을 찾아 척추에 방사선 치료와 뇌 종양에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았다. 암의 종류에 맞게 약도 이것 저것 쓰면서 관리를 해나갔다.


2021년 연말까지 엄마는 생활에 문제가 없었다. 아무도 암환자라고 믿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고, 첫 손주의 등하원과 언니네 살림을 도와주셨을 정도로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암에 대한 책도 찾아보고 운동도 나름대로 하면서 관리를 했지만 2022년이 되자 상황이 나빠졌다.


누운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셨고, 약 부작용으로 발과 다리가 아프다는 얘기를 자꾸만 하셨다. 실제로 걷는 것이 힘이 들어서 나중에는 지팡이도 사용해야 했다. 결국엔 우울증까지 겹쳐서 우울증 약까지 함께 먹어야 했다.

엄마의 방 안에는 온통 약과 영양제로 가득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식단과 약에 질려하셨다.        



엄마는 몸져 눕기 전까지 언니네와 제주도로 여행도 가고, 나와는 전시도 보러 가고, 성당에도 병 낫길 기도하러 가고, 좋아하시는 짜장면도 같이 먹으러 가곤 했다.

병이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 비교적 생활이 자유로울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가족 중 한 명이 아프면 온 가족이 아프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아픈 것처럼 마음이 쪼그라드는 듯하고, 행동 반경도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남들은 내가 여유로운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나는 아픈 사람처럼 심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엄마를 보러 언니집에 가려면 1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왕복 2시간 거리를 엄마를 보러 2주에 한 번은 갔다.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얘기를 주변인들에게 거의 하지 못했다.

엄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가족과 친척 외 극소수였다. 엄마의 엄포로 인해 시댁에까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꺼내자니 너무 슬퍼지고 말을 하기가 꺼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으로는 함께 아팠다.

작가의 이전글 저는 원치 않는 아이였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