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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쓰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다

[<소스 코드>-더 비기닝] - 빌 게이츠의 자서전을 읽고

by 홍월

<[소스 코드] - 더 비기닝>은 빌 게이츠가 쓴 자서전이다.

무려 52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두께와 무게에 짓눌렸음에도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책을 읽은 것은, 독서토론 모임의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고, 우리 세기 최대의 부자 중 한 명의 삶을 훑어봄으로써 그의 경험과 지혜를 잠시나마 빌려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고, 책을 읽다가 마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내 성격에 기인한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깨달은 점은 이 책이 빌 게이츠의 전 생애를 다룬 것이 아니고 마이크로소프트 창설까지만 다룬 자서전 1부라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일주일에 걸쳐 500페이지 넘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었는데 빌 게이츠의 생애 1/3만 본 것이라니. 이 말인즉슨, 빌 게이츠의 생애를 다 보려면 이런 책을 두 권 더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책 두 권은 아직 출판도 하지 않았다.


잠깐동안(!) 조금 김이 새기는 했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어쨌든 2025년 독서 목록에 또 한 권의 책을 리스트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땡큐.


빌 게이츠의 생애를 다룬 책 <[소스 코드]-더 비기닝>의 1/3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BASIC 언어와 소스 코드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내용도 꼼꼼히 읽어서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문과인 내가, 그래도 IT를 이렇게라도 이해해 보려고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을 읽어도 책이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아랍어로 쓰인 것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요즘 무슨 성인의 문해력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이 책으로 내용을 확인하는 시험 문제를 내었다면 나는 문해력 미숙으로 판명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곧 나는 소스 코드와 컴퓨터 언어에 대한 빌 게이츠의 성공 스토리는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 쓰윽 지나가고 말았다.

나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독서를 중도포기하였으리라.


빌 게이츠의 탄생,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창업 스토리, 프로그램 개발 스토리, 마이크로소프트 창업 스토리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스티브 잡스에 비해 많이 알지 못했던 빌 게이츠의 생애를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서 느낀 점 몇 가지;

첫째, 빌 게이츠는 유복한 가정에서 타고난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다. 미국의 전형적인 백인 가정(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들 한다.)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나중에 은행 임원 및 자선단체 수장을 역임한 어머니, 학교 선생님 출신의 외할머니, 똑똑하고 착한 누이들 사이에서 부자들과 이웃하며 잘 자랐다.

역시 사람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태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인생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둘째, 인생은 타이밍이다. 하필 빌 게이츠가 학창 시절을 보내던 시기가 인텔에서 마이크로칩이 개발된 시기였고 이로 인해 하필 전자 회사들이 컴퓨터를 개발하던 시기였으며 또한 개인용 컴퓨터의 개발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물론 모두가 이런 시기를 살지만 누구나 빌 게이츠처럼 개인용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괸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무언가가 시작되고 개척되고 새 시대가 열리는 시대에는 기회가 길거리 돌멩이처럼 널려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셋째, 엉뚱한 성격은 큰 대업을 이룬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점이다. 이토록 모범적이고 다복한 가정과 환경을 지닌 빌 게이츠조차 학교에서는 엉뚱하고 돌발적인 아이로 지적당하고 사고를 치기도 한다. 수학에서는 탁월했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바닥을 훑기도 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가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엉뚱함은 창의성과 상상력과 색다른 관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들이여, 아이들의 엉뚱함을 유발하시라!


넷째 이면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느낀 점은 생각하는 연습과 그 생각에서 내 생각을 만드는 연습과 글 쓰는 연습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과외활동을 하면서도(등산, 바다 체험, 보이스카우트, 연극 등등) 에세이와 일기 쓰기를 꾸준히 하였다. 학교 과제는 많은 부분 에세이 쓰기였는데 하나의 에세이나 리포트를 쓰는 데에도 허투루 하지 않고 온몸을 다해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썼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로.

온갖 자료를 모으고 읽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열리고 가치관이 정해지고 가치관의 근거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리 교육을 반면교사 삼어보면 너무 부럽기까지 하다.

하버드를 입학하기 위해 반드시 에세이를 써야 한다. 하버드를 위한 에세이를 쓰는 빌 게이츠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회고하면서 알차고 흥미를 끌만한 에세이를 썼을 것이다. 그래서 하버드에 합격을 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 <[소스 코드]-더 비기닝>은 빌 게이츠가 자신의 손으로 쓴 책이다. 문과도 아닌 사람이 이 만한 분량의 글을 이렇게 편안하게 글을 쓴다는 걸 보면 그가 교육을 통하여 많은 글을 써왔고 수없이 많은 시간 자신의 손과 머리로 사고하고 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부자도 결국은 글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따로 하는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자 한다.

핑계를 대고 보니, "내가 글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그저 남 따라 흉내내기 한 건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 동안, 글을 업로드하지 않는 동안 마음이 무겁고 편안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아직 들키지 않은 아이와 같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나는 글 쓰는 과정과 무언가를 쓰는 고통 속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사람이긴 한가 보다.


돌아온 탕아가 정신 차리면 더 반듯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처삼촌 벌초하듯' 읽은 빌 게이츠이지만 내가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감각을 깨웠다면 이 벌초도 해야만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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