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Jan 03. 2023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하필 3000년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원작 소설이 있기에 조지 밀러가 아니라 소설의 작가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3000년 전 시바 여왕으로부터 시작했는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았는가. 추측건대 시바 여왕의 시대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 없던 그 시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거나,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복잡해 보이지만 아주 단순하다. 두 장소에서 일어난다. 터키와 런던. 전반부는 터키, 후반부는 알리테아가 런던으로 돌아와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겹쳐진다. 누군가 만약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 혹은 어른들의 알라딘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야기다.      


  다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신기한 것은 영화가 시작될 때의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보다 먼 미래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뒤에 전달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지 밀러 감독은 이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확장시킨다. 이야기는 남는다는 것일까.      


  알리테아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점을 찾으려고 하는 서사 학자다. 그녀는 강연을 위해 터키로 향한다.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욕망을 부정한다. 지니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을 때 자신은 갈망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거나 혹은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전부 교훈적인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 이 남자는 강연에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주장에 반박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제 모든 이야기는 은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갈망이다. 즉, 그녀는 이야기가 은유로 환원되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가 온전히 이야기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남자의 반박을 듣자마자 쓰러진다. 그러고 난 다음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골동품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치 “이야기”를 찾는 것처럼 호리병 하나를 구매한다. 그리고 호리병에서 지니가 빠져나온다. 여기서 지니는 그녀의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재도 아니다. 지니는 이야기 자체다. 이 이야기인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소원을 빌지 않자 자신이 호리병에 갇힌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첫 번째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 세 번째는 르네상스 시기이다. 그리고 지니는 세 번 호리병에 갇혔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히는 네 번 갇힌다. 이 숫자는 중요하다. 이 숫자가 중요한 까닭은 런던에서 페이드아웃 기법이 네 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시바 여왕의 이야기에서 지니가 호리병에 갇힌 까닭은 시바 여왕을 욕망한 벌이다. 솔로몬의 여자를 욕망한 벌. 두 번째는 노예 소녀가 죽기 직전 소원을 빌지 않아 갇힌 이야기,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왕가를 쫓다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었지만 다시 갇힌 이야기, 네 번째는 자신이 시바 여왕보다도 더 사랑했던 소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갇힌 이야기다. 이 네 번의 갇힌 이야기에서 지니가 세 번이라고 이야기한 까닭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어 갇힌 이야기는 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 같다. 여하간 이 갇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소원을 빈다. “나를 사랑해 줘”     


  그녀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을까. 그녀의 갈망이 깨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지니가 채워준 이야기를 하면서 갈망이 서서히 깨어났을 것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연주를 들을 때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조지 밀러는 정확하게 그걸 찍었다. 그리고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순간에서 알리테아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솔로몬이 시바 여왕에게 여자들이 갈망하는 공통된 것을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알리테아는 성공한 지식인 여성이다. 르네상스 시기 여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억압이 있었던 그 시기의 소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갈망하던 첫 번째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주체성. 잠시 샛길로 빠져서 이야기하자면 최근 현대 여성 영화는 계속해서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그랬고, <코르사주>도 그랬다.      


  그다음은 역시 “사랑”이었을 것이다. 지니와 사랑을 나눈 후 조지 밀러 감독은 이상하게 촬영했다. 알리테아의 호텔방에 마치 지니가 사라진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하간 여기서부터 이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지니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들과의 언쟁을 하는 알리테아와의 장면에서 지니는 잠시 사라진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알리테아의 욕망이 불러낸 환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지니는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알리테아는 그가 그 짜증스러운 소리들을 흡수하는 순간 흐느낀다. 이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 않았던가.      


  두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옆집 할머니들에게 지니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미움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알리테아와 그에 대해 인간들은 모순 덩어리라고 말하는 지니의 장면이다. 네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사라져가는 지니에게 알리테아가 사랑은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인간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 네 개의 페이드아웃 장면과 지니가 호리병에 갇히는 네 번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지니, 즉 이야기가 우리에게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니의 3000년의 역사와 런던에서의 짧은 기간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갈망과 사랑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지니)는 서사 학자 알리테아의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옆집 할머니가 지니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차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은유나 환유가 아니며 그 자체로 실재한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실재하면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에 달릴 것이다. 


2023년 1월 3일.

작가의 이전글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의 <중간착취의 지옥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