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믈리연 Mar 07. 2024

너와 나의 호칭 'You'


오늘 아침, 샌드위치를 씹으며 첫째가 말했다.

"00아! 우리, 엄마한테 반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어? 그게 뭔데?"

"영어로 'You'라고 하면 돼. 영어는 존댓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도 돼."




20년 전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티브이를 보는데, 김미경 강사가 나왔다. 그분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엄마는 '김미경' 강사가 나오는 채널은 모조리 다 보는듯했다. 어느 날인가 식탁 위에 그분이 낸 책이 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아차' 하는 문장을 찾았다.

당시, 첫째 아이가 사춘기를 겪고 있었나 보다. 사춘기 딸아이와 대화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했다. 그럴 땐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문장이 있었다. 서로를 'You'라고 부르면서  엄마와 딸이라는 위계질서를 내려놓고 동등한 입장에 선다 했다. 합법적인(?) 반말이 오가다 보면, 대화가 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글을 보면서 언제 결혼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후,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2019년에 하브루타 공부를 하며 만난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다가, 이 얘기를 꺼냈다. 우리 말로 대화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뭔가 애매하거나 속마음을 터놓아야 할 경우가 있다면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말이다. 아이와 나를 동등한 입장에 두고 싶다고. 합법적인 반말로 대화하다 보면 서로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쉽게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를 덧붙었다. 

다시 5년이 지나 2024년 오늘이다. 내가 먼저 꺼낸 게 아니라, 아이가 먼저 그 얘길 꺼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이유와 아이가 생각하는 이유는 엄연히 달랐다. 아이는 그저 엄마한테 반말할 수 있는 기회로만 여겼다. 영어 공부를 늦게 시작한 둘째도 솔깃했나 보다. 순간, 뭔가 낚인듯한 기분이 오가며 20년 전에 내가 했던, 그때 그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낮에 여행전문 작가님과 식사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잡음 없이 잘 지내는 비결이 궁금했다. 최근에 알게 된 분이지만 자녀교육에 있어서 실질적인 조언을 많이 해준다. 사교육보다는 아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고, 스스로 결정하게 하며, 어른으로 대한다. 여러 곳을 데리고 여행하면서, 아이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 공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 잘하는 건 더 잘할 수 있게 지지해 주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도 내 아이들과 이런 관계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아이가 원하는 방식인 'You'라는 호칭을 부르고 불린다면? 물론, 각자가 가진 이유는 다르지만, 모로 가도 산으로 가면 된다고 소통만 원활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작가님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 안. 운전대를 잡는데 자꾸만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식탁을 둘러싸고 나와 아이들이 앉아있는 모습. 유창하지 않아 손짓, 발짓해가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 진지한 주제가 아니라도 평소에도 편하게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 너도 나도 같은 호칭을 부르며 친구처럼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머지않아 올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며, 'You'라는 단어가 주는 마법을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