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미 Oct 06. 2020

엄마와 아빠는 별거중

내가 어렸을 때부터 대학생 되어서까지 엄마와 아빠는 심하게 싸우셨고,

결국 내가 대학생일 때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시작하였다.

남동생은 한창 사춘기가 시작할 중학생 때 일이다.

지금은 엄마와 아빠가 별거한지 12년이 넘었다.




엄마, 아빠의 싸움을 지속적으로 지켜본 나는, 연신 "둘이 이혼하라"라고 외쳤다.

엄마는 이혼을 원하셨지만, 아빠는 이혼이 어렵다는 입장이셨다.

엄마는 가정주부라 경제적인 능력이 뒷받침되질 않았다.

이혼을 원하셨지만, 혼자 모든 것을 견뎌야 했기에 이혼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이혼하라"라는 말을 할 때면 속상하다고 하셨다.

나는 평범한 가정처럼 오순도순 잘 지내고 싶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바랐다.

평범한 가정도 티격태격은 하겠지,, 하지만 우리 가족은 티격태격 수준이 아니었다.

나와 내 동생의 정신이 건강하고 씩씩하며 긍정적인 성격으로 자란 게 신기할 정도로,,,,


엄마, 아빠가 싸울 때마다 크게 싸우니 나는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고 차라리 엄마, 아빠가 떨어져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을 하였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지만, 부모님이 한 집에 사시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부럽다.


대략 7~8년 까지는 아빠에게는 "엄마" 단어 금기어, 엄마에게는 "아빠" 단어가 금기어였다.

한 번씩 아빠는 엄마를 한 번씩 찾으셨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엄마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셔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곤욕이었다.

명절이 되면 가족이 함께 지내야 하는데 나는 가족 집 두 탕(?)을 뛰어야 했다.

아빠 집 한번, 엄마 집 한번,,

한 번은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안마의자를 사드리려고 하면 두 대를 사야 하는구나,,,,,, 아,,,,'

부모님 별거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내 동생이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라 부모님이 챙겨줄 것도 많은데 챙김을 받지 못하였다.

엄마는 아직도 내 동생이 어릴 때 별거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안고 사신다.

내 동생 또한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런 행동을 보면서 엄마는 또 마음 아파하셔서 동생에게 다그치는 어떠한 말도 못 하신다.

내 동생을 볼 때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이혼, 별거는 정말 좋은 것이 아니구나..'라고 자주 생각을 한다.


두 분 모두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마음이 훨씬 편했을텐데 그게 아니다.

두 분 모두 월세에 전전하면서 사시는데 부모님 나이가 매년 드실 때마다 부모님 나이가 드시는 만큼 내 어깨의 짐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 그나마 아빠는 집이 없더라도 본인의 노후는 보낼 수 있을 만큼 준비는 되어있는데, 엄마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두 분의 이런 상황과 거지 같은 가정의 경제 능력을 생각하면서 주저앉아 운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의 나와 결혼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 동생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걱정만 앞선다.


나도 꽃길 걷고 싶은데,,

두 분 모두 저렇게 사시다가 언젠간 이혼을 하실꺼고,,

다른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