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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Dec 14. 2024

미륵산 할머니와 엿


지역에는 높이가 430m로 그리 높지는 않은 평지 돌출형 암산인 미륵산이 있다. 이 산의 옛 이름은 용화산이다.

백제의 왕권을 다시 확립하려는 무왕의 꿈이 펼쳐진 곳이 바로 이 산 아래였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무왕이 한강 유역을 잃고 미륵산 아래 광활한 대지에 섰을 때 마음은 어땠을까?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에는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3 탑 3 금당 중 현재 서탑과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국민의 염원이 절절한 때를 지나고 있다. 시대마다 위기는 있었고 어떤 방향으로든 역사는 흘러가지만 국제적 위기에 직면한 작금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무왕은 백제 왕권 확립을 위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데 대한민국을 위해서 국민의 뜻에 합당한 위정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기껏 작은 암산 하나를 두고 작금의 현실까지 운운하는 엉뚱한 서두가 되었는데 풀어내려는 이야기는 정치와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이야기다. 이 매거진이 그렇지 않은가. 상촌출신 모지리의 좌충우돌 어설픈 유년기.

미륵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곳에 사셨던 분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어릴 적 내가 태어난 초가집에 대해서는 아주 어렴풋한 기억 한 가지 외에는 거의 없다. 그렇다. 초가집에서부터 상촌 모지리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우리 4남매 맏이인 오빠와 어머니께서 여름이면 한 번씩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처럼 나누는 이야기 속 집은 그다지 견고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오래 타지에 출타하실 일로 집을 비운 사이에 하필 여름 큰 비가 쏟아졌고 견고하지 못한 초가집 천장에서 물이 새서 어머니와 맏이인 오빠가 방 안에 대야와 그릇을 몇 군데 놓아두고 오들오들 떠는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내 기억의 초가는 두 칸짜리 방과 부엌, 그리고 방 겸 창고로 썼던 부엌방이 어렴풋이 기억에 있다.

그 집에서 내 기억이란 아파서 열에 들떴는데 혼자 빈 방에 누워있다가 열에 뜨뜻해진 베개를 뒤집어 돌려가며 베고 누워서 쪽창으로 마당을 내다보며 식구들을 기다리던 것이다. 아마 대 여섯 살이 아닌가 싶다. 그게 초가집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어린 내 걸음으로 40여분 되는 거리를 네 살 차이인 오빠 등에 업혀서 언니는 내 책가방을 들고 등교했던 날이 잦았다. 간신히 등교해서 담임선생님 얼굴도장 찍고 1교시 수업도 하지 못하고 바로 조퇴하고 아픈 몸으로 되돌아 걸어오는 길은 까마득했었다. 결석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덕에 초중고 12년을 개근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아픈 아이를 꼭 학교에 보내야 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태어나서 열 살 이전까지 많이 아팠다고 하니 지금의 건강체질은 모두 그때 미리 병치레를 한 덕인가 객쩍은 구실을 찾아본다.


내가 태어나던 해 소천하신 우리 할머니 김소정여사님은 큰고모 16살, 우리 아버지 두 살 때 남편을 잃으셨다. 그때부터 공식적으로 혼자 살아오셨다. 비공식적으로는 세 고모님 결혼 후 생계가 어려워(애초에 꽤 많은 전답이며 제법 넓은 대숲을 끼고 행랑채가 딸린 커다란 기와집도 있었으나 남편이 없는 과부에게는 사기꾼들이 들끓는 법. 둘째 고모 시부와 어떤 사기꾼의 작당에 휘말려 세상일에 어리숙한 김소정 여사님의 재산이 그들의 사업 밑천에 쓰였고 그 일로 전답을 거의 다 잃으셨다는 후문이 있으나 과묵한 우리 아버지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큰고모께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잃어버린 전답이 아까워 푸념처럼 꺼내신 이야기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막둥이 우리 아버지만 데리고 잠깐 새 영감님을....

사기꾼에게 탈탈 털렸어도 늘 허허 웃으시는 김소정 여사님의 낙천적이고 좋은 성격을 우리 아버지께서 꼭 닮으셨다. 어쨌든 할머니는 사람꼴을 잘 보시는 분인 데다 남편이 없다 보니 동네 과부들, 보부상들이 초가집에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양은냄비며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파는 상인이나 동동구리무, 향긋한 분첩이며 이쁜 꽃신, 바늘쌈지 보따리를 끼고 다니며 파는 잡화상들이었다. 집에서 만든 엿을 진열한 엿판을 목에 건 엿장수도 거기 한 자리 끼었는데 그분이 바로 미륵산 도인 할머니셨다. 없는 살림에 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으니 김소정 여사님 며느리가 손님치레하느라 분주하셨을 텐데 주고받는 거래가 확실한 며느리가 그 일로 힘들었단 말씀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걸로 보아 그분들도 나름 마땅한 대가를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 초가시절부터 그렇게 해서 미륵산 도인이 김소정여사님과 친구를 텄고 이후 엿파시는 일을 그만두신 후에도 김소정 여사님의 오랜 친구로 남은 분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얘기로 전해 들은 부분이다. 어린 우리는 그분을 미륵산 할머니라 불렀다.

 김소정여사님은 내 기억에 없고 다만 초가마당 건너에 새로 지은 큰 블록집에서 살 때, 자개박이가 화려한 파고다재봉틀이 놓였던 벽 위쪽에 영정사진으로만 할머니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사진 속 할머니는 1924년생인 올해 한국나이 101세이신 큰고모님 모습과 싱크로율 99.9%이다. 지난 추석 오랜 요양원 생활을 청산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기에 찾아뵈었는데 소천하신 김소정여사님이 앉아 계신 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미륵산 할머니는 김소정여사님이 소천하신 후에도 15년 정도를 혈육도 아닌 우리 집에 계속 왕래하셨다. 차멀미로 버스도 타시지 못하는 미륵산 할머니께서 해마다 잊지 않고 30리가 넘는 우리 집을 걸어서 방문하셨다. 그때 연세가 70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한다.

초가집 자리에 다시 빨간 벽돌집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신 할머니는 당신 자손 일처럼 새 집을 기뻐하셨다. 다락방까지 빠짐없이 양옥집 구석구석을 구경하시며 쩍쩍 갈라지고 딱딱해진 손바닥으로 벽이며 방바닥을 쓸으시며 "아이고, 좋다. 집 좋다." 말씀하시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새 집을 지은 여파로 살림이 빠듯해진 우리 집은 어머니도 잠깐 시내 공단에 여공으로 몇 년간 일하셨고 우리 4남매는 모두 초중고 학교 다니느라 바빠졌다. 그러니 미륵산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어도 혼자 빈 집을 지키고 계시다가 늦은 오후에나 식구들을 만나실 수밖에 없었다. 미륵산 할머니는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누런 삼베 보자기를 풀면 나오는 밀가루 속포대에 꼭꼭 싸매놓으신 엿을 내놓으셨다.

엿을 세워서 하얀 밀가루를 툭툭 털어내고 건네주시는 미륵산 할머니의 엿은 가운데에 콩을 넣어 만든 콩엿, 엿을 참깨에 굴려 만든 참깨엿과 흑임자엿이었다. 때로는 조청과 아직 말랑한 가래떡을 꺼내놓으시기도 했다. 배가 고픈 우리는 손도 씻지 않고 미륵산 할머니께서 주신 엿을 넙죽넙죽 받아먹느라 미륵산 할머니의 얼굴보다는 엿을 건네시는 하얀 밀가루 묻은 손이 기억에 더 오래 남았다.

하교 후 날마다 썰렁하게 텅 빈 집이었는데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 그게 그렇게 든든했다. 부모님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날에는 주무시고 가시기도 하셨는데 딸 셋이 자는 방에서 할머니까지 끼어서 자려니 비좁기는 해도 왠지 객식구가 한 분 늘어서 더 훈훈해진 마음으로 잠이 솔솔 왔다. 잠들기 전에 "할머니 내일도 우리 집에 계실 거예요?" 하고 꼭 그러셨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묻곤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느새 할머니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빈 속에 서둘러 가시곤 안 계셨다. 다시 삼십 리가 넘는 길을 그렇게 새벽 찬 바람, 찬 이슬을 맞고 가셨다.


사춘기를 지나는 나는 후각마저도 예민해졌는지 미륵산 할머니가 방에 앉아 계시기만 해도 노인냄새가 거슬렸다. 냄새가 거슬린 내 얼굴에서 좋은 표정이 나올 리 없었다.  중학교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초겨울 연합고사를 앞두고 그즈음 나는 어쩐 일인지 매일 이유 없이 코피를 쏟았다. 하필 밥상 앞에서 하얗게 끓인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끓인 밥 대접에 빨간 코피가 뚝뚝 떨어지곤 했다. 그때도 미륵산 할머니가 오신 날이었다.

"코피에는 쑥이 좋은디." 말씀하시더니 할머니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으로 나가셨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돌아오신 할머니 손에는 살얼음이 낀 바짝 마른 쑥잎이 들려 있었다. 쑥 냄새가 나서 그게 쑥인줄 알았지 이미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풀이 쑥잎으로 보이지 않았다. 꽁꽁 차가워진 손으로 할머니가 쑥을 비벼서 적당하게 둥글린 다음 내 코에 밀어 넣어 주셨다. 그날 잠자리에 누워 할머니에게 데면데면했던 게 너무 죄송했지만 말씀드리지는 못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더 이상 빨간 벽돌집에 오시지 않았다. 할머니 댁이 어디인지, 또 댁에 전화가 없다는 할머니를 찾기도 힘들었겠지만 그즈음 우리 집 식구 모두는 격동기 같은 시간들을 보내느라 할머니가 벌써 두 번은 다녀가셨을 계절이 지나도록 아무도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미륵산 할머니와 엿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것처럼 살다가 한 번씩 궁금하기도 했는데 그럴 땐 송구함을 떨쳐내려 여전히 잘 지내시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미륵산 할머니는 우리의 오랜 기억 속으로 가라앉으셨다.




남편이 말기암으로 투병하면서 어릴 적 먹었던 음식들을 찾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엿이었다. 대부분 식재료를 사다가 직접 만들어 내놓곤 했는데 엿은 그럴 수 없었다. 마침 지역에는 전통엿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었다.

시동생에게 부탁해서 황등 용산엿을 사 왔다.

우리가 어릴 적 엿장수에게 빈 병이며 낡은 고무신, 찌그러진 대야와 오래된 책, 비료포대를 주고 바꿔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지역 축제장에서 가판대 위에 올려진 먹기 편한 크기의 엿도 그 맛이 아니었다. 미륵산 할머니가 삼베 보자기를 풀고 밀가루 속포대에 말아서 내놓은 밀가루가 겉면에 묻어 있던 엿. 주름지고 두터워진 소박한 손으로 직접 입에 넣어주시던 그 엿 맛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미륵산 할머니 얼굴도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두운 밤에 철로변까지 내려가셔서 쑥을 뜯어오신 차가운 그 손이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손이었다. 내 새끼 네 새끼 가리지 않는 손. 바쁘면 뉘 집 부엌이든 들어가서 밥상을 차려 내오시는 손. 출출하고 허기진 입에 가래떡과 엿을 밀어 넣어주시던 손. 집집마다 놓였던 그 흔한 전화기의 수화기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문명의 편리함이 비껴간 손.

그 손을 지금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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