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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Mar 20. 2024

보스의 화내기 3단계

자수성가형 사업가의 특징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거리감이 유지되어야 웃음진 얼굴만 볼 수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사람이 짓는 보기 싫은 표정들도 보게 된다.


하늘거리는 몸을 가진 중년의 한 남자분은 얼굴에 늘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분의 업무가 고달프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늘 그분의 옅은 미소만 보았다. 어느 날 운전기사를 통해 들은 그분의 모습은 내가 알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운전하다 길을 잘못 들거나 차선변경을 잘못하면, 운전석을 발로 차며 뒷좌석에서 엉덩이가 들썩이도록 화를 낸다고 했다. 나는 놀라 운전기사분께 그분이 정말 그러시냐 되물었고, 기사님은 ‘말도 마세요’라고 답했다. 지랄 맞게 화내는 건 어느 보스나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나의 상사만 지랄 맞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나는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나의 보스는 기분 좋게 웃으실 때면 동글동글한 얼굴에 두 눈이 반달로 뜨는데, 인심 좋은 귀여운 할저씨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 표정은 아주 중요한 외부인사를 만날 때나 볼 수 있는 진귀한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에 보스는 미간에 내천자를 깊이 새긴 화난 포청천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 보스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며 사장님 소리를 들은 지 십수 년쯤 된 시점이었다. 국내에서의 사업은 일정궤도에 올랐고, 장기적으로 볼 때 국내시장은 큰 미래가 없다고 보고 해외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제조업이 주력이었지만, 제조업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사업들도 보스가 손대는 족족 활황이었다. 사업을 그 수준으로 끌고 올라간 것은 보스 본인의 능력과 노력이 팔 할인 듯했다. 이런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은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추진력과 열정이 대단하다. 성장하는 열정적인 사업가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것은 행운이었으나,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을 만큼 늘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화를 냈다. 보스의 화내기는 3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호통이 1단계, 눈으로 살인 레이저를 쏘는 것이 2단계,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이 3단계였다. 1번은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고, 2번은 왕왕, 3번은 드물게 일어났다.


보스의 못다 이룬 꿈이 성악가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보스의 성량은 대단했다. 노래는 잘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성량은 훌륭했다. 신경을 날카롭게 긁는 하이톤의 고성과는 달리, 흉통의 울림이 있는 묵직한 호통이었다. 비서실에 근무하다 보면 내가 한 실수로 혼나는 것이 50%이라면, 나머지 50%는 잘못을 한 임직원과 더불어 덩달아 혼나는 경우다. 보스에게 불려 가 이유 없이 혼나고 있노라면 염라대왕 앞에 불려 간 망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기에서 좀 더 화가 나면 2단계가 발동된다.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호통을 지르다가 갑자기 몇 초간 침묵하며 상대방을 노려보는 것이다. 사무실에 가득 찼던 무언가가 삽시간에 얼어붙고, 영원 같은 찰나의 순간이 흐른다. 눈으로 레이저를 쏴 상대를 태워버리는 순간이다. 해외 프로젝트 건설을 담당하던 과장님께서 보스의 살인 레이저를 맞고 그 자리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던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건설 현장에서 까맣게 그을린 과장님은 거의 숯이 되어버렸다. 말과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지막으로 드물게 발동되는 3단계에는 당신 책상 위의 물건을 내던지셨다. 주로 손 닿는 거리에 있는 키보드, 키폰, 만년필 등이었다. 물건을 내던지며 호통까지 겸하는 콤비 공격이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쯤 되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죄라도 지은 건가 싶었다.


회사 내의 직급은 보스의 화에 반응하는 수준으로 나눌 수 있었다. 1단계에 큰 일이라도 난 듯 파티션 위로 고개를 쳐드는 미어캣류는 대리급 이하 직원들이었다. 직급이 낮을수록 파티션 위로 머리가 더 많이 올라오며 눈치를 살폈다. 2단계 살인 레이저는 대리급 이하에는 발사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레이저를 맞고 내상을 입는 건 주로 과장, 차장, 부장급들이었다. 임원들의 내공은 레벨이 달랐다. 3단계는 임원급 인재들에게만 발동되었는데, 무엇이 날아다니든 임원들의 표정엔 타격감이 1도 드러나지 않았다. 임원분들은 사장실에서 나오면서 “그 와중에 값비싼 건 안 내던지네”라며 농을 하는 분들이었다. 리스펙.


나는 일개 사원이었으니 1단계 미어캣류에 속했는데, 비서라는 이유로 2단계와 3단계 화마까지 당하는 날이면 영혼이 넝마가 되어 사장실에서 기어 나오다시피 했다. 임원처럼 내공도 없으니 매번 직격타를 맞으며 죽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연약한 정신머리라도 이렇게 반복적으로 담금질을 당하면 맷집이 쌓이게 된다. 새까맣게 타버렸다가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니, 탄화되어 단단한 숯이 되었달까. 이제는 20년 내공이 쌓여서 보스가 화마를 내뿜으면 살수차를 가져오거나, 제풀에 지쳐 불이 꺼질 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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