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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Mar 31. 2024

픽션, 그녀 이야기

마음 속 미로


주변이 늘 북적거리는 사람이 있다. 일주일 중 약속 없는 하루가 없고, 간혹 빈 하루가 생기면 바로 그 시간을 누군가를 만나는 일들로 메워버리는 사람. 혼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잘 못 하는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육아휴직을 한 것이 생애 처음 쉬어보는 것이라던 그녀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새로운 걸 배우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아이의 학교일이든 주변인들의 대소사든 뭐든 마음을 쓰며 열심이었다. 휴직기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그녀는 마지막까지 더없이 바삐 지냈다.





막달에 배에 우량아를 품고 있었을 때, 의사는 그녀에게 뱃속의 아이가 더 크면 자연분만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연분만을 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임신기간 내내 자연분만을 위해 애써온 그녀였다. 의사의 말을 들은 막달의 그녀는 뱃속의 아이가 더 크지 않도록 쓰러지지 않을 만큼 적게 먹으며 매일 수킬로를 걷고, 아파트 25층 계단을 오르내렸다. 출산이 수인사대천명이라면, 나는 대천명만 바랐지만 그녀는 매일 수인사했다.  



삶은 왕왕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저 랜덤으로 돌린 룰렛 같을 때가 있다. 그녀의 첫 출산은 자연분만을 향한 그녀의 노력을 무상하게 했다. 병원에서 꼬박 이틀을 진통했으나 분만은 전혀 순조롭지 않았다. 자연분만을 더 고집하다간 이제 그녀와 뱃속의 아기 모두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아이의 목에는 탯줄이 감겨 있었고, 그녀는 오랜 진통으로 기력이 다 빠져버렸다. 의사는 곧 그녀의 남편에게 부인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라고 말할 참이었다.



애를 낳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연분만을 원하는 산모에게 최악은 진통은 진통대로 겪다가 결국 제왕절개를 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진통의 고통과 제왕절개의 고통을 모두 겪어내야 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아홉달간 그녀의 노력이 허무하게도 그녀는 최악의 출산 시나리오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남편이 나를 포기하고 애를 선택할 것 같은 거에요ㅎㅎㅎ 그래서 얼른 제왕절게 하겠다고 했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으나 나는 겸연스러웠다. 남편이 자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농에 절반쯤 진심이 묻어있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순간 웃음으로 얼버무렸는데, 난 그렇게 반응했던 사실이 그녀에게 두고두고 미안했다.





어느날 그녀는 내게 알콜의존증이 생긴 것 같다고 고백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술을 마시고 싶다고. 삶이 행복한 와중에 알콜에 의존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표정 너머 그녀의 괴로움이 맥연히 보여서 나는 얼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얼마후 우리는 선술집에서 만났다. 술잔을 부딪히고 안주 접시를 비우며, 빈 접시에 이야기를 쌓아나갔다.


그녀는 장녀였고, 부모는 그녀가 성장하는 내내 그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며 컸다. 그녀가 딱 한 번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못했을 때, 부모는 "이제 내가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니?"라고 했다. 가장 상심했던 것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었지만 부모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기않고 자신들의 체면을 먼저 걱정했다. 그 때 그녀는 깨달았다.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마땅한 무언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핍이 그녀의 삶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그녀는 말을 재치있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유쾌한 남자를 만났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남자와 다정한 눈웃음을 짓는 그녀. 서로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품고 있던 아홉달이 꿈처럼 행복했다. 부모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이 그의 사랑으로 충당되는 듯 했다.


그와 그녀를 반씩 꼭 빼닮은 아이가 태어났고, 그는 아이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녀를 향했던 사랑의 표현이 이제 온통 그들의 아이에게 쏟아졌다. 사랑을 부족하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남편의 사랑은 의미가 컸다. 그녀는 내심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아이가 받는 사랑의 양이 100이라면, 그의 부성애는 날이 갈수록 커졌고 그녀의 모성애는 딱 그만큼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그의 사랑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떨치려 할수록 가을비에 젖은 낙엽처럼 착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쩌면 산후우울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출산 후에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이 널뛴다. 출산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서글퍼지기도 하고, 남편은 그 모든 고생 없이 사랑하는 아이만 턱- 하고 얻게 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투정을 부렸는데, 그는 호르몬이 널뛰던 시기의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변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최근 그의 외도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관심이 온통 아이를 향했을 땐, 서운했지만 괜찮았다. 아이는 그인 동시에 그녀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제3자에게 향한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외도가 매순간 수시로 선명해져서 맨정신으론 버티기 힘들었다. 계속 술을 마셨고, 왕왕 필름이 끊겼고, 기억이 더러 통째로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취해도 제일 잊고 싶은 사실은 한순간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애증이 깊어 갔다. 그가 너무 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괴롭게 했다. 그가 예전처럼 그녀를 다시 사랑해준다면, 그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은 이미 차게 식어버린 듯 했다. 그는 더이상 그녀를 향해 실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았고, 둘 사이엔 더이상 웃음이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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