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거창하게까진 아니더라도 막막한 마음을 풀데 없어 쓰기 시작한 백수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서
이렇게 끝맺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건 대충 끝맺음을 하게 되었다.
2개월간의 백수생활은 예전에 쉬던 시간에 비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애가 탔고 너무 큰 사고가 터졌고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럽고 지옥 같은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총 30개의 회사에 지원했지만 이력서 열람 알람만 울렸을 뿐이고
프리랜서 마켓도 살짝 두드려 보았지만 문의 한 건조차 받을 수 없는 매서운 프리시장의 맛만 톡톡히 보았을 뿐이다. 회사 다닐 때 내가 오히려 바빠서 거절해야 했던 알바 일들도 내가 역으로 알바일을 구걸해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경기가 어려워 일거리가 없다는 허탈한 대답일 뿐이었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면접 연락이 온 회사들은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 봐도 블랙기업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들 뿐이라 몇천 원의 내 소중한 교통비를 아껴주곤 했다. 백수 생활 한 달이 1년 같이 길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이후 나를 누구냐고 물어보시는 아버지를 보며 몇 번의 지옥을 경험하고 며칠 사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눈물을 쏟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취업의 과정도 아버지의 보호자 노릇도 오로지 나 혼자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추석 이후면 좀 나아지겠지라는 태평한 생각은 더 이상할 수 없었고 수입원이 간절해졌기에 더더욱 열심히 지원했다.
밤이면 온갖 걱정에 심장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아 신경안정제까지 처방받아먹어야 했지만
울면서도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집안일을 하고 아버지 면회를 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서류를 알아보고 준비하고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 전날 밤 두 시간을 울다 잠들어 눈이 팅팅 부어서는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7시에 집을 나서 대학병원=무한 기다림의 공식을 몸소 체험한 날, 아버지의 인지 능력이상은 섬망증상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너무 섣불리 큰 걱정하지 말라는 교수님의 말에 안도하며 또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신발도 바지도 폭삭 젖은 채 언제 끊어진 지도 모를 끈 떨어진 가방을 끌어안고 본 면접은 꽤나 분위기가 좋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분명히 너무 기뻐야 하는데 폴짝폴짝 발걸음도 가벼워야만 하는데
비에 젖은 신발이 너무 무거웠던 걸까, 잠을 못 잔 탓이었을까, 대학병원에서의 무한 기다림에 지쳤던 탓인 걸까 나는 그저 이 비에 퉁퉁 불은 신발과 양말을 좀 벗어던지고 이 지친 몸을 좀 뉘이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보통의 삶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