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에 소원성취 양초를 놓고오다
11월 초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안동하회마을로 여행을 다녀온 남편이, 식구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가을 여행을 제안했다.
마침 회사 복지로 할인을 받아서, 성수기도 피하고 막내 시험도 끝난 기념으로 양평으로 떠났다.
내년에 고3이 되는 셋째는 곧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자기는 할 일이 많다고 해서 딸 둘만 데리고 떠났다.
아울렛에 들렀다가 가을이 저물어 가는 산천을 눈에 담으며 흥얼흥얼 양평에 도착하자, 거리는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양평의 번화한 곳과 거리가 멀어서 식당도 가게도 문 닫은 곳이 더 많아 보였다.
겨우 검색해서 양동역 근처에 '팔팔 갈비'라는 곳에 갔다.
꾸밈없는 외관이 가정집처럼 보였다.
좁은 입구에 들어서자, 기와집을 개조하여 만들었는지, 마당도 연결되고 안쪽은 제법 넓었다.
내가 제일 늦게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큰딸이 "다섯이요." 했다.
남편과 막내가 정정했다.
"넷이요."
"다섯이지. 아! 넷이요."
"여섯이요."가 입에 익은 큰딸이 군대 간 남동생을 빼고 자연스럽게 "다섯이요." 한 것이다.
여섯 살 때도, "어른 둘, 아이 셋이요." 하고 먼저 나서던 딸이었다.
그나저나 넷이서 테이블 하나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넷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어색하다니.
테이블은 꽉 찼지만 허전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고추장 삼겹살 2인분, 돼지갈비 2인분을 시키고, 반찬으로 나온 음식들을 집어먹었다.
찐고구마와 브로컬리를 버무린 샐러드와 순대인가 싶었던 표고버섯조림까지 한끝 다른 반찬이 인상적이었다.
이 집은 파절이에 고춧가루 대신 들깨가루가 들어가서, 새콤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숙소만 예약해 두고 계획 없이 떠난 여행. 기대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맛깔스러운 밑반찬과 매콤하고 기름진 고추장 삼겹살을 맛있게 먹으니, 음식이 주는 위로와 환대에 일상의 피로가 녹는 듯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차로 산길을 달리면, 운전석의 남편은 아이들이 처음 듣는 괴담들을 들려주곤 했다.
학교괴담부터 달걀 귀신, 화장실 귀신 등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에 차 안은 순식간에 무대로 변했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앞문을 드르륵. 여기도 없네? 뒷문을 드르륵. 여기도 없네?"
"......여깄네!!"
"꺄아아아악!"
"또. 또. 아빠! 또 해주세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이야기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열혈 관객이었고, 신나서 쉴 새 없이 연기하는 남편은 만담꾼이었다.
가로등 하나 찾기 힘든 깜깜한 산길을 달리며 이번에도 남편이 입을 뗐다.
"산길 무섭지? 깜깜해서 귀신 나올 것 같지 않아?"
"아빠! 이런 길에서 누가 태워달라고 손짓하면 태워줄 거야?"
"글쎄. 좀 무서운데? 심야괴담회에서 많이 봤잖아. 누가 손짓해서 태웠는데 알고 보니 제삿밥 먹으러 가는 귀신이었고."
"으악!"
"그럼 당신. 길에 두 사람이 서 있다가 태워달라고 하면?"
"그건 좀 더 무서운데? 태워줬는데 갑자기 강도로 변하면?"
"심야괴담회를 너무 많이 보더니, 더 무서워하잖아. 나처럼 안 봐야지. 상상을 덜하면 무섭지도 않아."
오싹한 괴담을 곁들인 드라이브는 우리 가족만의 여행 콘텐츠이다.
드문드문 희미한 불빛이 별처럼 박혀 있는 시골길을 지나서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인테리어가 모던하고 공간이 깔끔해서 딸들이 신이 났다.
은은한 간접 조명이 심플한 가구를 안온하게 비췄다.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가 '휴식'이란 말과 참 잘 어울렸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파우더룸과 화장실이 달린 방 두 개에 각각 싱글침대가 2개씩, 총 4인이 머무르게 되는 숙소였다.
항상 6인 가족이 함께 다니다가, 군대 간 아들과 공부하는 딸아이를 빼고 넷이서 여행 오니, 어쩌다 침대 하나씩 차지하게 되는 여행이 되었다.
야식을 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쉬다가, 집에 있는 딸아이와 영상통화를 했다.
"안 무서워? 문단속 잘하고 자."
딸들이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더니 깔깔거리는 소리가 났다.
딸 셋 중 한 명이 안 오니, 여행지에 언니들 사이에 껴서 깍두기처럼 자거나 엄마랑 자던 막내가 침대 하나를 온전히 차지했다고.
그것조차 신나는 이벤트가 되는 일이라니, 막내는 뭘 해도 귀여움 독차지이다.
침대 하나 차지하고 잠만 잘 자도, 사진 모퉁이에 얼굴만 빼꼼 보여도 침투력 대단하다고 이야깃거리가 된다.
둘째 날에는 양평 용문산에 위치한 용문사에 갔다.
군대에 있는 아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초를 사서 메시지를 적어 치성을 드렸다.
아들은 gp에 들어가서 두달 동안 연락을 못하는 상황이다.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지. 아들 건강히 지내라고 소원 하나만 빌자."
"내년엔 고3 되는 셋째 차례야."
두 명이 빠진 여행이었지만, 멋진 숙소에서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1100년 이상의 은행나무가 있는 용문사에서 치성도 드린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양평 용문산 용문사 올라가는 길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