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은 많이 배우신 분은 아니었다. 아빠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알아준다는 실업계 고교를 나오셨지만, 엄마는 국민학교 졸업이 끝인 분이다. 우리 엄마는 kb 이 두 글자도 구분을 못해서 은행을 헤매는 사람이다. (은행들이 자꾸 영어 명칭으로 바꾸던 당시에 엄마 때문에 너무 속상했고, 지금도 못마땅하다.) 두 분의 직업이 그럼 예술과 관련이 있냐면 그렇지도 않다. 아빠는 평생 쇠를 다듬으셨고, 엄마는 평생 미싱기를 돌리셨다. 부모님의 학력이나 직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질 생각을 전제하기 위해서다. 우린 부자였던 적도 없고, 대부분의 일가친척 역시 우리 부모님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경제적 여유가 넘치는 분들이 절대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나는 문화생활을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게 한 적이 없다.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혼자인 사진이 많은데, 외동이기도 했지만 부모님 두 분이 함께 움직이실 상황이 못 되어서 그런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엄마 혹은 아빠랑만 다닌 것은 아니다. 그저 두 분 중에 한 분이 시간이 되실 때 나를 데리고 나가셨던 것 같다.
백남준 작가의 미디어 아트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감동을 받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저 텔레비전이 높게 쌓여 있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당시 미술관엔 아빠와 함께 갔었다. 아빠가 나에게 어떤 특별한 작품 설명을 해주셨냐면 아니다. 아빠는 그저 적당한 자리를 봐서 나를 두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셨다. 그냥 그날 아빠와 그 미술관을 함께 가서 즐거웠던 기억만 있다. 어린 나의 시각에서 대단히 높고 거다란 텔레비전 탑은 이상하고도 신기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아름다움이나 대단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 백남준 작가를 겨우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그 작품을 보았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다만 혹시 내가 어릴 때 봤던 그 텔레비전들이... 혹시나 그건가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고, 오래된 사진 속에서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아빠와 함께 나가서 신났던 그날이 바로 그 미술관에 갔던 날임을 말이다. 아빠는 전시장에 나를 데려가는 것을 즐기셨던 것 같다. 아빠와 코엑스 전시장엔 꽤 여러 번 갔었다. 각종 페어가 열릴 때마다 아빠와 함께 갔는데, 지금 생각해도 제일 당황스러웠던 것은 아마도 아빠가 하시는 업무 분야와 관련된 박람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나는 아빠와 코엑스를 가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코엑스까지는 지하철로 꼬박 한 시간을 가야 했지만, 가는 동안 아빠와 수다를 떨어서 좋았다. 코엑스에 가면 전시장엔 늘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다. 어떤 날엔 신기한 기계도 봤고, 어떤 날엔 사진들을 어떤 날은 만화 그림도 봤다. 무료로 입장을 할 수 있는 행사는 대부분 무언가를 많이 팔았지만, 딱히 내 손에 무언가를 사들고 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아빠의 손을 잡고 서서 무언가를 봤다. 그것은 유명한 작가의 미술 작품일 때도 있었고, 그런 유명 작가의 작품을 모방한 무엇일 때도 있었고, 이름 모를 작가의 작품이거나 판매를 위한 상품일 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아빠와 서서 보았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빤히 들여다보는 아빠를 따라서 나도 숨죽이며 그것을 보았고, 그 속에서 신기한 것을 보면 아빠와 이야기했다. 우리 부녀의 해석이 맞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아빠가 그 순간 나와 함께 서있었던 것은 아주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아빠와 취향이 달랐다. 내가 엄마와 늘 함께 한 곳은 소극장이었다. 당시 우리가 가장 자주 다니던 곳은 신촌에 있던 어린이 소극장이었다. 최소한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갔던 극장의 구조는 지금도 눈에 그릴 수 있을 만큼 선하다. 엄마가 신촌에 가자고 하면 그 극장에 가자는 것이었는데, 나는 항상 엄마와 함께 위에서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잘 인지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항상 2층의 저렴한 좌석을 구매하셨던 것 같다. 워낙 작은 극장이어서 2층은 좌석이라고 해봐야 한 줄이었는데, 나와 엄마는 항상 그 이층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릴 땐 그냥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거 같다. 나이가 좀 들어 어린 시절 기억을 해보고서야 왜 그때 나는 항상 배우들의 머리가 보였을까를 생각해보니 깨달은 사실이었다. 엄마는 두어 달에 한 번. 그 극장에 새로운 작품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면 나를 데리고 가셨던 것 같다. 티켓은 가장 저렴한 자리였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몰랐을뿐더러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신촌에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면 나는 마냥 즐거웠으니까 말이다. 엄마와 그렇게 신촌에 나가면 공연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그때 나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파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엄청 좋아했는데, 그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내겐 특별한 것이었다. 그때 봤던 공연의 내용을 기억하느냐면 사실 하나도 기억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엄마와 나란히 앉아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던 무대는 오롯이 기억한다. 공연이 끝나면 한껏 상기되었던 것도 오롯이 기억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에겐 신촌은 극장과 동의어였다.
내가 나이가 들어 연극, 뮤지컬을 즐기게 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도 여러 번 다녔다. 그때 엄마가 신촌에 엄마와 함께 갔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셨었다. 나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제 내가 다 커서 반대로 엄마를 데리고 극장을 다닌다며 흐뭇해하셨다. 그때와 달리 나는 엄마에게 더 크고 좋은 극장, 더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내심 뿌듯했다. 그러다 세종문화회관에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 공연을 보러 간 날이었다. 공연장 1층으로 들어서 내부를 둘러보는데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여길 처음 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무대와 가까운 1층 좌석은 분명 처음 앉아보는 자리였다. 그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항상 엄마와 함께 신촌의 소극장에서만 공연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딱 한 번 꽤 큰 극장에서 뮤지컬을 봤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인어공주'였다. 내가 대극장에서 봤던 공연이 '인어공주'라는 것을 나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늘 내 시야 아래에서 움직이던 배우들이 그 공연에선 내 눈높이까지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공연 연출 중에 인어공주가 그네 비슷한 것을 타고 위로 올라오는 연출이 있었다. 그래도 무대가 멀어서 배우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눈높이 아래가 아니라 내 눈높이 정면에 위치한 그 순간이 머릿속에 오롯하게 남아있었다. 어른이 된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의 1층의 티켓을 예매할 때도 대극장 공연이라 가격이 제법 나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보러 오기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당시의 우리 가족 형편으로는 아마 더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에게 대극장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마도 2층 어쩌면 3층 티켓을 겨우 구매하셨을 것이다. 그 대극장이 세종문화회관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알았다. 우리 부모님은 월세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신 분들이었고,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내 집'이라는 게 없던 분들이었다. 그 살림에 어린 내가 기억하지도 못할 그 대극장 공연을 보여주겠다고 티켓을 구매하신 그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우리 가족사진 중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제일 이해 못 할 사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 사연을 보면 웃기면서도 애틋하다. 당시 우리 집은 차가 없었으니, 서울에서 독립기념관까지 우리 가족이 어떻게 갔을지는 말해 뭐하겠는가. 당시 사진 속에 짐만 봐도 커다란 여행가방이 함께 있다. 저 짐을 다 들고, 오직 이 하나뿐인 딸에게 기념관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새벽부터 부산을 떠셨을 두 분. 자가용도 없이 오로지 대중교통만 타고, 가방을 메고,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말이다. 마땅히 자리를 펴고 앉을 곳이 없어서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우린 도시락을 먹었다. 그 여정 속에서도 즐거웠던 우리 가족이 추억에 오롯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 온 작은 기념품은 여전히 우리 집 거실에 놓여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 과제 때문에 국립중앙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히 용산에 국립중앙 박물관이 개관하고 나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역사 교과서에서만 본 것 치고는 유물들이 너무 낯익었다. 당연히 모르는 유물 처음 보는 유물들이 더 많았지만, 몇몇은 어쩐지 언젠가 본 것 같았다. 생각을 해보니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도 열심히 내 손을 잡아끌고 다니셨던 두 분이 서울에 있는 박물관들을 안 데리고 가셨을 리가 없었다. 경복궁의 국립 민속박물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린 시절 어느 때쯤에 박물관에 데리고 가셨던 것 같다.
어른이 되었을 때 과거의 그 경험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떤 전시품, 공연을 봐도 어린 나는 충분히 감상하지도 못하고 어떤 생각도 못했다. 그럼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여기까지 내 글을 읽고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면 정말 할 말이 없긴 하다. 그 순간들이 나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에게 박물관, 미술관, 극장은 부모님과 함께한 추억이 있는 공간들이다. 어른이 된 내가 박물관이 낯설지 않고, 미술 관람이 자연스럽고 극장을 좋아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내가 역사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예술가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 풍부한 경험이 나의 생각의 폭을 키웠다.
굳이 이것들을 학업과 연관을 짓자면, 학창 시절의 나는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 제법 잘하기도 했다. 국어 비문학 지문에서 나는 예술 분야 중 미술 관련 지문이 제일 읽기 편하다. 연극과 뮤지컬은 굳이 말해 뭐하겠는가. 연극, 뮤지컬 대본이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좋은 추억으로 남은 문화생활들이 나라는 존재를 보다 다채롭게 완성시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들이 내 안목을 키웠고, 내 취미 활동의 폭을 넓혀 놓았고,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했으며, 나를 메마르지 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