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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Apr 20. 2024

결혼으로부터 자유를 배우다

필자가 결혼을 하기 전에 주변에서 몇 번 들었던 말이 있다.


결혼을 하면 모든 면에서 행복하다. 하지만 단 하나 잃어버리는 게 있다.
'자유'다.

  

지금도 결혼 초기이지만, 결혼 직전과 결혼 바로 직후에는 상단에서 말한 말이 정말 사실인 줄 알았다.


필자가 이전에 썼던 글 <<무중력은 자유가 아니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룰’을 정말 싫어했었고, 룰 없이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것을 지향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결혼은 달랐다.

  

무엇 하나 같이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 까지도.

그러지 않으면 다툼과 약간의 단절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심한 단절로 이어질 뻔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정을 정하는 바깥 활동부터,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주중에는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날지, 하루하루의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 그 식사는 누가 무엇으로 준비할지, 빨래는 어떻게 할 것이며, 방과 거실과 욕실과 현관과 베란다의 청소는 어떡할지, 서재실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작은 방에는 어떤 물건을 놓을지, 그릇을 더 살지, 마트에 가서 식자재 중에 A를 고를지 B를 고를지 아니면 아예 사지 않거나 혹은 인터넷으로 주문할지 등등


혼자였으면 필자가 하던 방식대로,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행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나누면서 결정하자니..

(또 이 가운데 보이지 않게 느껴지고 드러나는 작고 큰 알력 다툼들..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자존심 때문에 내세우는 고집들.. 작고 큰 외침과 직접적이고 우회적인 위협들은, 그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또 필자가 그렇게 행할 때마다 불편하고 부담되고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필자의 삶의 활력소인 저녁 운동(달리기)을 주 4~5회에서 주 1~2회 밖에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활력도 줄었을뿐더러 살도 쪘다. 4키로)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면서 필자는 서두에서 들었던 이야기에 점점 동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결혼생활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를 완성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필자의 생각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자유를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A자유라고 말하겠다.


아무래도 최근의 트렌드가 그렇다.

A자유는 그것을 만끽할 때 기분이 끝내주게 좋다. 본인이 세상 유일한 기분이고, 날아갈 듯 하며 다른 것들은 부럽지도 않게 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자유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A자유 안에 거하면서 누리는 것은 자유 안에서 느끼는 감각 중에 ‘일부’다. 

다시 말하지만 전부가 아니라 ‘일부’다.


A자유를 학자들은 '~ from'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딘가로부터,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안 좋게 이야기 하면 일탈, 혹은 탈피, 혹은 도망하는 것이 되는 거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A자유가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into ~'의 자유다. 

이것을 Z자유라고 말하겠다.


Z자유는 어디로 들어가려 하는, 맞서려고 하는, 감내하는 것을 자신의 의지로서 택하는 자유다.

   

쉽게 말하면 Z자유는 능동적 자유, A자유는 수동적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왜 수동적 자유야?’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무중력은 자유가 아니다>>는 글에서 다뤘으니 궁금하다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러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를)


물론 결혼생활에서는 A자유를 마음껏 구가할 수 없다.


사람은 자아가 있고, 자아에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그 의지가 어디서 왔는지 따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만)

또한 최근 한국 어디를 가더라도 온통 A자유에 대해서만 떠들고 책이든 미디어든 주위 사람이든 A자유를 추구하고 그것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절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중 결혼생활은 A자유의 걸림돌로 아주 가득 차있다.

(그 안에서 육아는 어떨지.. 육아는 필자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써, 감도 오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것, 서로의 가족을 부양하는 이 모든 일은 A자유를 거스르게 한다.


A자유를 중심으로만 이 상황을 바라보면 아주 불행 그 자체다. 

그래서 단절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쉽게 솟아오르던가!

단절해버리고 A자유를 추구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때도 얼마나 자주 있던가!


하지만 속아서는 안 된다.


A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마음속에 바람이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마치 무지개를 걷는 듯 한 느낌을 주지만,

A자유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A자유를 실제로 살면서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 Z자유를 살면서 행복한 것보다 훨씬(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다시 강조하는데, A자유를 살면서 누리는 횡경막이 떨리는 듯 한 감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훨씬 짧다. 생각보다 훨씬 짧다.




시간이 없어서 글을 급히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토요일의 황금 같은 오전 시간인데, 아내가 잠에서 깨면 이제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도 같이 할 것들이 많다.)

일단 브런치에 올려놓고 나중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듬겠다.

(사실 이런 마음으로 늘 글을 올리지만 실행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필자도 안다.)


필자는 바람이 쉽게 드는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금사빠였고, 이성을 쉽게 쉽게 좋아했다.


결혼 전에는 이 기질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할까 싶은 고민도 있었다.

(필자보다 아내가 더 걱정하는 거 같아서 참 미안하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이것이 아침안개처럼 사라지지 않더라.

   

그런데 결혼 전과 다른 것은

필자에게는 아내와의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내 감정이나, 물리적인 상황이나, 여타 관계가 어쩌든지 간에 서로만을 사랑하고 바라보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것은 결속이기도 하지만(구속력이 있기도 하다.), 필자에게는 ‘진정한 자유’로 보인다.

 

글을 그럴싸하게 쓰고자 자위하는 게 아닌(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필자의 옛 기질이 필자의 감정과 생각 속에서 널뛰면서 다른 이성에 대한 이미지를 펼쳐놓을 때에, 

필자 안의 A자유가 아내와의 불협화음과 파워게임을 마주할 때에 이따금씩 아내와의 단절을 종용할 때에     

옛 기질과 A자유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약속을 지키는 것


그러기 위해 서로가 맞추고, 스스로를 낮추고, 용서하고, 용기 내어 먼저 손 내미는 것


Z자유를 구가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아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아의 특권이다.


자유는 너무나도 놀랍기에 이보다도 더 많은 것들이 있으리라..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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