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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네 Mar 23. 2022

모닥불과 개미: 전개 방법 - 묘사

100일 글쓰기 카페: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

묘사는 사물이나 상황으로부터 받은 느낌을 그림 그리듯이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우선 묘사(描寫)와 관련된 사전적 정의를 보면 ‘사물의 ’어떠함‘을 그리는 것으로 대상의 빛깔, 감촉, 냄새, 소리, 맛 등의 특성을 그림을 그리듯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묘사는 표현 방식과 목적에 따라 주관적 묘사와 객관적 묘사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주관적 묘사는 필자가 받은 인상이나 느낌을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이다. 주관적 묘사는 필자의 느낌을 중심으로 독자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오감 중심의 공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때문에 필자가 대상에서 받은 느낌이나 인상을 다양한 수사적 표현 기법을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다음은 주관적 묘사의 사례이다. 


“새로 배정받은 3학년 3반 교실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둘씩 셋씩 모여 속닥거리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나는 왜 이렇게 되는 노릇이 없나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지난 2년 동안 맺어 온 관계의 밑천이 있었다. 나 혼자만 무일푼이었다.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눈이 크고 눈꼬리가 비스듬히 놓인 아몬드처럼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꽃잎처럼 붉은 아이였다. 그의 예쁨은 보통의 예쁨이 아니라 뭐랄까. 앵앵거리며 달려가는 구급차의 싸이렌처럼 다급하고 위태로운 예쁨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다른 아이를 보고서였다. 눈길의 대상이 된 아이는 줄곧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무심히 교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옆모습에서도 언뜻 엿보였던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활짝 그야말로 낙하산이 펴지듯 활짝 펼쳐졌던 것이다. 나는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작렬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결코 쉽사리 직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기에 교실이란 공간이 갑자기 허구나 마법의 장소로 변해 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 권여선(2016). <당신은 알지 못하나이다> 


객관적 묘사 방법은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때문에 객관적 묘사는 특정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술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모습 자체를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전달하는 방식이다. 객관적 묘사는 메시지에 초점을 두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 부분과 전체의 비율적 균형 등 전달 목적에 따라 묘사 대상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은 객관적 묘사의 사례이다. 


”무화과 꽃은 우리가 아는 보통의 꽃 모양과 다르다. 꽃받침과 꽃자루가 길쭉한 항아리처럼 비대해지면서 내벽에 흰빛의 작은 꽃들이 빽빽이 달린다. 이 때문에 겉으로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열매는 가지 밑의 것부터 차차 위로 올라가면서 익으며 흑자색 또는 황록색으로 된다. 이처럼 겉모습만으로 보면 꽃도 피지 않고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무화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 ‘농식품백과사전’ 


이처럼 묘사는 대상에 대한 정보나 필자의 감각적인 인상과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여 상상력을 자극하고 구체화시켜 필자의 관점을 초점화하는 방식이다. 묘사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다음은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의 짧은 수필이다. 


“통나무가 우지직 타오르자 별안간 개미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오며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통나무 뒤로 달려가다 넘실거리는 불길에 휩싸여 몸을 뒤틀며 타 죽어갔다. 나는 황급히 통나무를 낚아채서 모닥불 밖으로 내던졌다. 다행히 많은 개미들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어떤 놈은 모래 위를 내달리기도 하고, 어떤 놈은 솔가지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곧이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도망쳐 나온 개미들이 불길을 피해 달아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공포를 이겨낸 개미들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통나무 둘레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개미들이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통나무를 붙잡고 버둥거리면서 그대로 거기서 죽어갔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대체 그 어떤 힘이 그들을 내버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일까?”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70), <모닥불과 개미> 


‘모닥불과 개미’ 수필과 관련한 자료를 보면 ‘솔제니친’은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모닥불을 발견하고 불 옆에 타기 좋은 썩은 통나무를 하나 집어 들어 불 속에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닥불에 통나무가 잘 타는가 싶어 지켜보다가 통나무 속에서 우르르 뛰쳐나온 개미떼를 발견한 것이다. 타들어가는 개미떼를 보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놀라서 통나무를 낚아채서 불 밖으로 던졌을 것이다. 갑작스런 불길에 놀라서 통나무 밖으로 나오던 개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어서 아직 불타고 있는 열기 가득한 통나무로 향해서 기어오르는 것을 본 것이다.

우리는 그냥 이 장면을 모닥불과 개미떼의 행동에 대한 묘사로 그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솔제니친은 타오르는 모닥불보다 개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왜 그러한지를 함께 묻고 있다. 작가의 관찰과 관계 속에서 묘사된 장면은 상징적인 메시지가 담긴 관점과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통나무집은 단순한 썩은 통나무가 아니라 고향이라고 표현하였다. 우리글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문장은 처음 아니면 끝에 있는 경우가 많다.

‘모닥불과 개미’는 주관적인 묘사이자 상징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묘사를 통해 독자의 관심을 확장하며 불길의 폭력성과 버둥거리는 개미를 대비시켜 작가의 의식적 관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모닥불과 개미의 관계는 모닥불의 실체가 되는 국가의 폭력성과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의 희생을 통해 민중의 저항과 염원을 극대화시킨다.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라고 방심하는 순간  '에드워드 카'는 반문한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세상에 둔감해지며 나이들어 가는 내 자신을 향해 자문한다. ‘나는 진화하고 있는가? 여전히 크고 작은 불길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 혹시, 진화에 급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불길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꺼지지 않은 다양한 우울과 절망의 불길 또한 무수하게 존재한다. 미래와 희망을 불태우는 절망 앞에서 선택지는 다양하다. 회피하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터전과 미래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불길 속 통나무로 기어오르는 개미들의 투쟁과 궐기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절박함 속에서 솟구친 이타심의 거룩한 유산일 수 있다. 

1970년 러시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솔제니친은 부당한 국가 폭력과 민중의 절망을 모닥불과 개미로 묘사하였다. 국가의 폭력 앞에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항거했던 민중들을 떠올리며 '모닥불과 개미'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묘사는 글의 전개 방법 중에서 어쩌면 서사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 


“개미들은 왜 불길 속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삶의 불길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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