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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네 Mar 31. 2022

우량계 관측과 영농일지

100일 글쓰기 카페: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

                                                                                                                                         


당신에게 비는 어떤 의미인가요?   


   

  

며칠 전 아파트 계단에서 창밖을 보고 계시는 옆집 어르신을 만났다. 아파트 라인별 통로 위 지붕에 있는 하얀 양철통을 지켜보고 계셨다.      

“어르신 무슨 일 있으신가요?”

“지붕에 저걸 설치했어요.”

지붕 위 하얀통을 가르키며 말씀하셨다.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계단인데 지붕 위를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있었어요?”

호기심 가득한 나의 질문에 옆집 어르신은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셨다.      

“저기에 비를 관측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설치해서 있었는데 유 선생은 못 봤나 보네요.”

20년 넘게 이곳에 살았지만 통로 지붕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누군가 담배꽁초를 버렸을 때는 혀를 끌끌 차며 저걸 어찌 치울까 걱정을 한 적은 있었다.     

양철통은 왜 설치하셨는지 물었더니 비를 관측하는 것이라 하셨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비를 관측하셨다고요. 언제부터요?”

나의 질문에 옆집 어르신은 새로 2L 양철통을 설치하게 된 속상한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아니 지난번에 그만둔 아파트 관리소장 있잖소. 그 양반이 여태 내가 설치해서 비를 잘 관측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구정 무렵에 외부에서 명절 손님이 오니까 환경미화 차원에서 그랬는지 양철통을 철거해 버렸더라고 하, 참 기가 막혀서! 그런데 그걸 글쎄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에다 버렸지 뭐예요. 내가 설치한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요.”

그렇지 않아도 전임 아파트 관리소장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던 터라 어르신의 말에 바로 맞장구를 쳤다.     

“진짜로요. 아이고야. 속상하셨겠네요. 아니 철거할 거면 우선 어르신께 양해를 구하고 철거하더라도 교장 선생님께 의견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야, 진짜 화가 나네요. ”     

20년 전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하신 옆집 어르신은 매일 부지런하게 농사를 짓고 계시는 터라 한 통로에 마주 보고 살아도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싶지 않다. 그나마 옆집 아주머니는 반찬이랑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주시는 터라 자주 얼굴을 뵙지만 옆집 어르신은 간혹 마주치기 때문이다.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 어르신은 비를 측정하게 된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사실 내가 저걸로 비를 관측하고 있는 것은 우리 10층에 사는 양반이 묻길래 알려주긴 했소만 지역마다 비가 내리는 양이 일정하지 않아요. 또 같은 순천이라고 하여도 동네마다 비가 다르게 내리고 그래서 이걸 관측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년 전부터 아니지 하여간 오래 전부터 비가 얼마나 오는 지 관측하고  있었어요. ”     

강우량 관측과 관련하여 관심을 보이자 나중에 옆집 어르신이 나에게 보여준 수첩에서 나름대로 비를 관측한 이유를 농사일지에서 짐작하였다. (눈에 띠는 부분만 간추려 보았다.)                                      

2002. 2. 28일 정년 퇴임

       4. 28일 정해준 고추 240주 해룡

       5.3 고추 4줄 560주 이식

       5. 5일 깨 4줄 심고. 콩 2줄 심기

       6. 10일 고구마 순심기 3두덕

       6. 20일 고추에 진딧물약 살포

       6.27 고추에 탄저, 진딧물 약 ... 계39주 죽음. 역병 –흙과 공기 닿은 곳 썩음.

       8. 3 고추 수확 4.5(40kg 쌀가마니)가마니 1차 수확

             –중략-

       11. 2일 고구마 수확. 11.6일 – 보리 60평 파종, 생강 수확


2003. 4. 5일 감자 2줄 심음(빨간 감자) 비닐 속에서 새순 고사

      4. 28일 고추 3줄 372주 해룡에서 3,500원 400주 가져옴. 가지 심고(얻음)

      5. 16일 참깨 3두덕 심음(파종)

      5. 27일 참깨 솎음. 콩이식 (포기 없는 곳) 참깨는 땅이 말라도 심은 후 분무기로 물고 일정도 많이 줌, 3           일 후 싹이 나옴 2회 물주면 더욱 좋음. 심고 1회 3일 후 1회

      6. 7일 참깨 2주 추가로 심고, 물 1회.

      6.10일 참깨 1줄 심고 물주기 (참깨 모두 6줄) 수확 4.5되(태풍피해)

      0. 0 보리 60평 수확. 약 3말됨, 차도에 깔고 차바퀴로 타작.

      6. 19일 고구마순 이식 4두덕. 들깨 모종 이식(작년대비 9일 늦음)

      7. 14일 감자 수확. 장마로 늦게 캠. 1/2정도 썩음.

      7. 28일 고추 1차 수확 4가마니

      8. 3일(일) 고추 2차 3가마니 수확 -후략 -


옆집 어르신이  놓은 농사일지에는 빼곡하게 작물을 심고 가꾼 1년과정이  페이지마다 담겨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오랜 기간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옆집 어르신은 이제 밭에 나가서 학생들을 대신해서 작물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계셨던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무수첩과 교무일지를 작성하시듯이 하루하루 농사일지를 통해 작물을 심고 가꾸며 수확하는 가정을 기록해 놓으셨다. 옆집 어르신에게 비는 어떤 존재이고 의미일까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농부에게 비는 가뭄 끝에 내리는 반가운 단비일 때도 있었고 오랜 장마에 작물을 썩게 하는 성가신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꾸준하게 비의 양을 관측하신 것을 보면 비는 식물이 성장하는데 햇볕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해마다 교무수첩에 빼곡하게 학생들의 변화과정을 기록하셨을 것이다. 때로는 행정적인 절차로서 교과와 비교과 활동 해마다 바뀌는 법령, 달마다 진행되었을 행사, 학생활동 등을 교무일지로 기록하고 결재를 올렸거나 하였을 것이다.   



이제 정년을 하고 학생들과 함께하지 못한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을 대하듯 농작물을 가꾸면서 교무수첩을 적듯이 식물에게 필요한 관리 방법, 제초제, 물주기, 수확과정 등을 기록하셨다. 농작물을 온전하게 추수하기 위한 정성과 관심 속에 비가 농작물에 미치는 영향까지 주목하신 듯하다. 작물에 필요한 비가 얼마만큼 내리는가에 따라 농사에 필요한 영농법까지 터득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1998년부터 강우량을 관측하신 것을 보면 그 집념 또한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건넨 수첩에 표시된 날짜가 1998년인 것이지 어쩌면 그 전부터 비를 관측하셨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기까지는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어르신의 우량계와 관측일지를 보면서 문득, 살면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살면서 매번 흔들렸던 인간관계,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아직 이루지 못한 꿈 등 수없이 많은 것 들에 나는 붙들여 있었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이런저런 고민을 기록하거나 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고민에 어떻게 대처하고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다들 그렇게 기록을 하고 관측하며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작년에 해남에서 50년 넘게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신 분을 뵙고 인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옆집 어르신의 농사일지와 강우량 관측일지를 보면서 그분들의 기록을 의미 있게 돌려줄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다시, 그분들이 했던 기록에 대해 나의 느낌을 기록해 보면 어떨까 하는 거였다. 80세에 가까운 해남 어르신은 사촌 동생을 잃어버린 것이 계기가 되어 기록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중요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하기 위해 기록을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엄청난 양의 수첩을 받아들고 가장 난감했던 것은 분명 기록은 맞는데 돈이 오가고 어느 자리에 참석하고 무엇을 하였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테면 금전출납부에 가까운 돈의 흐름과 물건 이동 그리고 자신의 생활반경에 대한 기록이었다.      

모월 모일 아무개네 집에서 거름 4포를 빌려 갔다. 모월 모일 옆집 아무개네 강아지가 몇 마리 태어났다. 모월 모일 누구네 큰아들이 장가를 가서 축의금을 얼마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한 사건이고 의미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쉬운 것은 그 기록에 대한 작성자의 느낌과 정서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했던 일과 흔적은 그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엔 그분의 ‘감정과 느낌’은 기록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름 4포를 옆집에 빌려주고 다시 받은 것은 중요한 기록이기는 하나 거름을 빌려주면서 들었던 생각과 다시 돌려받으면서 들었던 느낌까지 적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혼자서 들었다. 예를 들어      

‘옆집에서 고추모를 심기 전에 밭에 거름을 한다고 우리 집 거름 4포를 빌려갔다. 우리는 아직 두둑도 못 만들었다. 서둘러서 고추모를 심을 준비를 해야겠다. 아들놈이 대학 들어가서 다닐 학교 근처에 방 얻어주고 그러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공부가 시원찮아서 걱정을 했는데 큰 시름을 덜었다.’     

농사에 필요한 밭거름은 있거나 없거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의미가 남지 않지만 그날 거름을 빌려주면서 들었던 정서와 느낌은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록을 읽는 순간 금세 떠올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어렵게 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아버지의 기록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오래전 아버지께서 자신의 진학 문제에 대한 근심과 입학의 기쁨이 고추모 심는 시기를 놓칠 만큼 중요했고 아버지의 한숨을 덜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록 속에는 이처럼 상황에 대한 해석과 느낌이 실려야 두고두고 의미가 될 수 있을 거이다.     

옆집 어르신은 중간중간에 농작물이 기대만큼 수확을 거두지 못한 원인을 다양하게 기록하고 계셨다. 그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강우량이었을 수도 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농작물이 썩었고 적게 내리면 물을 주어야 하셨을 것이다. 비는 햇볕 다음으로 작물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비처럼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그 비중만큼 그것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였는 지 생각거리를 던져준 것이 옆집 어르신의 ‘우량계 관측과 영농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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