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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Nov 16. 2020

뭐든 잘하는 둘째 딸의 편지

비장애형제 '미나리'의 이야기

우리 집은 남매가 셋이었는데, 막내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당시 우리 가족들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자폐성 장애인 언니가 가족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폐성 장애의 특성상 감정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언니가 울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언니를 더 이상 바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성장기에서 언니와 내 사이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그 모든 사건에서 언니가 생각 없이 한 행동과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는 언니만의 방법으로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그걸 깨달으니 나도 언니의 시선에서 언니를 바라보려 노력하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 언니는 더 이상 '바보' 이거나 '아픈 언니'가 아니었다. 언니는 '언니' 그 자체였다.


언니를 언니로 인정해주니, 언니 탓으로 돌렸던 내 안의 트라우마나 결핍들이 보였다. 어쩌면 언니 탓이었는데, 굳이 언니 탓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들. 엄마, 아빠에게 무엇이든 잘하는 둘째 딸이어야 했던 것, 언니를 지키는 든든한 동생이어야 하는 것, 나는 알아서 자랐고 내 안의 모든 힘듦, 어려움은 나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것... 내 안의 결핍을 서른이 되어서야 엄마, 아빠에게 꺼내놓고 풀어놓게 되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


엄마. 아빠. 나는 늘 뭐든 잘하고 잘 해내는 둘째 딸이었잖아. 그런데 사실은 내가 잘할 것 같은 것만 골라서 하고, 백 퍼센트 할 수 있는 거만 도전했던 거였어. 나는 승패가 갈리는 게임도 싫어해. 지는 게 싫고 실패가 두려워서. 만약에 도전했던 그것들이 실패하면 며칠 동안 누워만 있을 정도로 실망하고 울었어. 엄마, 아빠는 몰랐지? 내가 엄마, 아빠 앞에서는 절대 안 그랬거든. 이상하게 엄마, 아빠가 나한테 알아서 잘하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내가 기억도 안나는 시절부터 나는 뭐든 잘 해내려고 한 것 같아. 결혼해서 아기를 키우고 있는 지금도, 내가 못하는 걸 못 참겠어. 난 잘해야 되는 사람이야 무조건. 그냥 내 생각이 그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조금 해보고 안 되면 바로 포기해.  사실은 엄청 하고 싶은 일인데도 내가 하기 싫다는 말로 거짓말도 하고.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게 한계가 온 적이 있잖아. 내가 그래도 경력이 쌓이려면 그 해까지는 버텨야 되는데 못 버티겠다면서 3 년 11개월 24일의 이상하고 애매한 직장경력이 쌓인 채 그만뒀어. 그동안 참아왔던 게 터진 거지. 그만두고는 3개월을 우리 집 강아지 초코 하고만 놀았잖아. 다들 직장을 그만두면 해외여행도 가고, 뭔가 힐링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못해내는 게' 그동안 못해봤던 거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나는 평생 혼자만의 숙제가 '뭐든 잘하는 애' 였거든.  그때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봐 주는 엄마, 아빠가 고마웠어. 덕분에 내가 심리적으로 조금 독립이 된 거 같아. 아, 내가 꼭 잘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엄마, 아빠는 나를 가만히 지켜봐 준다는 걸... 스물일곱에, 3년 11개월 24일 동안 몸 담은 직장을 그만두고서야 알았어. 


그때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지냈던 경험이 지금 되돌아봐도 꽤 괜찮았던(?) 경험이었던 거 같아. 나는 늘 잘할 것 같은 것만 도전하고 잘 해왔으니까. 그래야 되는 애니까. 이 생각을 깨는 게 힘들지만 평생 하나하나 깨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못해도 나한테 실망하지 말아 줘. 나한테 실망하지 마. 나는 이번에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엄마, 아빠가 나한테 실망하는 게 제일 두려운 거 같다고 깨달았어. 나한테 실망하지 마. 그런데 나에게 잘할 거란 기대를 안 하는것도 힘드네... 나는 항상 기대를 받아왔던 것 같아서 말이야. 기대는 조금만 해줘. 내 안의 틀을 깨 가는 내 과정을 잘 도와줘.




어느 날은 "자립한 장애인 언니랑 아픈 동생도 없으니 이제 엄마 아빠 애정 관심은 다 내 거네!"라고 말했더니 엄마 아빠가 놀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러네, 너한텐 그럴 수 있겠다."라고 말해주셨다. 그때는 '아, 내가 혼자 자란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Written by 미나리

*본 에세이는 2020년 상반기 나는 북클럽 '읽어봐요, 대나무 숲!'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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