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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 remember Mar 28. 2023

삶의 굴곡 한가운데.03

중국으로_02

「3. 다정도 병이라」



그러나 내 팔자가 그렇게 조용하진 않은가보다. 이번에도 내게 주변 사람들이 중국으로 가는 거냐고 말을 걸어왔다. 그 중 어느 아줌마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는데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줌마의 말을 들었다.


“중국으로 가는가? 그럼 나랑 내 딸(7세)도 데리고 가주면 안 되겠는가. 제발 살려줘라. 여기서 계속 있다간 나랑 내 딸 전부 다 굶어 죽는다.”


그 아줌마의 얼굴에 이전에 살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던 내 얼굴이 겹쳐보였다. 이 아줌마도 남편이 없는 걸까. 겨우 몇 달 전에도 나도 이런 심정이었었는데. 주변에 도와줄 이 하나 없이 책임져야 할 자식들만 있는 그 심정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다정도 병이라 하였더랬다.


난 이번에도 그들을 외면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그들을 동행으로 받아들였고 이전처럼 힘을 합쳐 두만강을 건넜다.


출발 전 아줌마에게 다짐을 받았다. 우리 중 어느 하나 군인이나 공안에게 걸리게 되더라도 무조건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답을 하기로. 산 사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이다.


만반의 각오를 하고 떠난 중국행은 그래도 한 번 해봤던 일이라고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봐둔 깊이가 얕은 지점을 골라 강을 건넜다.


무탈하게 강을 건넌 후 나는 아줌마와 딸, 이광성과 함께 막내딸이 있는 산 어귀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국을 떠난 우리 가족은 천리 타향 중국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튿날, 재회의 기쁨도 잠시. 산 어귀 좁은 천막 집에서 세 가족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가 썩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 나가야만 했다.


이광성은 거처를 마련하였다고 제 할머니와 아버지(상철)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 다음은 아줌마와 딸 차례였다.


아줌마는 중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어서 나보다도 앞날이 까마득했다. 산을 내려가 북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무슨 방도가 없겠냐고 수소문 하였다.


사람들은 무연고인 모녀가 살아가자면 인신매매 밖에는 답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어떻게든 아줌마와 그의 딸이 중국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야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모은 이야기들을 모아 꾀를 내어 그들이 근처 같은 탈북민의 집으로 무작정 들어가도록 손을 썼다. 그 집이 인신매매를 하고 있다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양심적으로 한다고 들었다.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 중에서도 양심적인 사람이라니. 말의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광성 같은 사람보다야 훨 낫다 들었더랬다.


고작 소개한다는 것이 인신매매라니 말을 건네는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별 수가 없었다. 굶어 죽는 것 보다야 팔려가더라도 먹고살 의지처가 있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나마 나이가 너무 많거나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여자는 인신매매도 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더랬다. 배고픔은 이처럼 선택의 여지를 차차 죄어오게 한다. 그 날로 아줌마는 인신매매를 당하기 위해 딸과 함께 달려갔다. 제 운명을 모르는 이의 선택에 내맡겼다.


훗날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소문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50먹은 어느 중국인 사내에게 시집을 갔고 7살 난 딸은 부잣집으로 입양을 갔다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잘 지내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시일이 흐른 후 나는 이광성에 관한 뒷이야기도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광성은 이제까지 인신매매를 해서 모은 돈으로 중국 모 처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하였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살던 중 나무를 불법 채취한 게 적발되어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이광성이 북한과 달리 중국은 나무를 나라 허락 없이 베어내는 게 불법이라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미지수다.


이광성이 중국 공안에게 붙잡히자 중국 호구(신분증)가 없는 탈북민이라는 게 밝혀졌고 덩달아 그 가족들도 모조리 붙잡혔더랬다.


결국 가족 모두가 북으로 송환되었다. 이광성과 그 가족들은 북에 송환된 후 감옥살이를 하였다.


하지만 사람이 제 버릇 개 못준다 했던가. 이광성은 감옥에서 출소 하고 나서도 또 다시 북에서 중국으로 사람을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 하였던가. 그가 인신매매로 중국에 여자애들을 팔아넘기려 하던 그 때 팔려지길 기다리던 여자아이들 중에 보위부밀정이 섞여 들어왔다고 한다. 보위부 밀정이었던 여자애는 보위부에 이광성이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려 할 거라고 고변했다.


이광성은 그 바람에 잠복해서 기다리고 있던 보위부원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후에 이광성은 공개총살되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이광성이 나무 불법채취로 중국 공안에게 적발되어 북송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이광성의 집에 한국 기독교 단체에서 찾아왔더라는 거였다. 그들은 이광성과 그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 집을 찾았던 거라고 한다.


이들이 이미 북송되었다는 걸 알자 ‘며칠만 더 일찍이 왔으면 그들이 살았을텐데...’ 하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들었다.


이광성이 공개처형 당한 후 이광성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내가 들은 이광성과 그 가족에 대한 소문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의 소식을 들은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리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잠시나마 연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내가 고생고생해서 중국으로 데려왔던 만큼 그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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