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곳곳에서 너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나는 휴가가 시작되기 전에 너를 만난 걸 사뭇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을 떠나면 너의 체취도 눈 맞춤도 손결도 잊기 한결 수월할 테니까.
정말 다행이다. 휴가 가기 전에 너를 만나고, 헤어진 게.
지난 며칠, 작년 말부터 올해 봄까지 만나다 헤어졌던 N과 다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다시 시작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날, 그에게 Strong connection 이 느껴지지 않아 더 이상 만나는 게 의미가 없다는 왓츠앱 메시지를 받고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다. 사실 나의 공간에서 자고 떠나는 N과 아침에 약간의 어색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가 준비해서 떠날 때 더 어색한 포옹을 하고 헤어질 때, 그가 집을 나섰을 때 한참을 공허하고 아쉬운 마음에 괜스레 몸을 움직이려고 설거지를 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2주간의 휴가를 가기 전 날이라 처리해야 일은 산더미 같은데 좀처럼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N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나에게 계속 더 머물기를 권유하는 그의 마음이 아마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헤어져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 확신이 없는 이런 상태, 그리고 어디로 향하지도 않는 단지 만나고 순간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달래는 이런 관계는 더욱 공허함만 불러올 뿐이다.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는데 나는 뭘 기대하고 그를 내 공간에 초대한 걸까.
본인의 꿈이 있고 공들여 쌓아온 커리어와 미래 계획이 있고 그 꿈을 향한 여정을 격려해주는 친구들이 있는 N의 삶에 비해 런던에서의 현재 나의 생활은 코로나 격리 생활인 것 마냥 혼자 일하고 혼자 밥먹고 잠드는 일상이 다여서 그 옆에서 나는 초라함을 느꼈다. 그가 영화제에 초대된 일, 그의 친구가 배우랑 사귀는 이야기 등등의 화려한 일들을 들을 때면 더욱 초라한 나의 모습에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그럴 때 이효리의 전 남친 자격지심 에피소드 - 핀 사줘, 너 돈 많잖아, 니가 사 - 를 생각하며, 아 그의 삶과 친구들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며 나의 삶과 비교하지 않으려구 애썼다.
어느덧 영국 생활 8년차를 접어드는 현재 런던에서의 나의 삶은 큰 열정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풀타임 일과 몇 명의 친한 친구들, 지난 7년 반간 여러 명과 함께 살던 플랫쉐어에서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원 베드룸 플랫,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끝을 맞이하고 있는 삼십 대의 나이의 노처녀. 즐겨 하는 취미는 짐에서의 그룹 클래스와 공원에서 달리기와 산책. 그 외에 더 다른 수식어를 찾기 힘들다.
영국에서 8년이나 살았어도 아직도 회사에서 회사 동료들과도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종종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고, 생각하는 걸 필터링과 머리 속 번역 과정 없이 바로 말하며 주변 사람과 교류하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친밀감을 쌓는 이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슬며시 올라온다.
한동안 새로운 모임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않다보니 이젠 어떻게 친구를 사귀는지도 까먹은 듯 낯설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가끔씩 우울감이 밀려올 때면 점점 이렇게 주변에 친밀감을 쌓은 그 누구도 없이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같이 애정을 구걸하다가 혼자 비참하게 마감할 것만 같아 두려움이 종종 의식을 잠식할 때가 있다.
'Law of attraction' 잠재의식의 법칙에 따라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나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바로 앞에 주어진 현재를, 오늘을 성실히 살아나가야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과 가벼운 스몰토크를 하는 것도 버겁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도 힘들어 혼자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점차 삶의 의욕도 생기도 말라가는 기분이다.
나의 삶은, 나의 30대의 남은 해들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누군가 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풀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결국은 내 인생의 문제는 나뿐이 해결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외부에, 사람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고,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나아가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자.
다행이다. 내일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