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중순의 기록
아침에 일어나니 AK에게 메시지와 사진이 와 있다.
어제 찍은 호수 사진이야.
설산을 뒤로 꽁꽁 언 호수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해보인다.
이번 주말 금토일 3일 동안 이탈리아 토리노로 여행을 간 AK는 토리노에서 1박을 한 후 다음 날 기차로 4시간 거리의 꼬모 호수로 이동하여 여행 중이다.
토리노로 여행을 간 이유는 니체가 쓰러진 곳이라서. 역사 못지 않게 철학을 사랑하는 AK 답다.
여행가서 연락 신경쓰지 말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뭐 음식 사진 보내줘 그런 말도 안했는데, 여행 중간 중간 어디엘 갔는지, 뭘 먹었는지, 내일 계획은 뭔지 메시지와 사진을 보내준다.
기대를 안했던 터라 이런 곰살맞은 제스처가 귀엽고 은근 놀랍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내가 선메시지를 하고 AK는 답장을 하고, 그것도 일 시작 전과 후, 자기 전 한번 이런 식으로 뜨문뜨문해서 텍스팅을 별로 안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천천히 가까워지면서 문자가 자주 오고있다.
점점 AK에게 기대치가 높아지고 있는 게 느껴지는 일화가 있었다. 조금씩 그에게 서운한 마음이 빼꼼히 올라올 때가 있다고 느꼈는데 지난 주 이스터 주간 여행 계획을 짜면서 AK에게 서운한 마음이 크게 올라왔다.
영국 뱅크 홀리데이이고 총 4일을 연달아 쉴 수 있는 연휴라 런던 근교 기차 티켓이 빠르게 팔려 매진에 임박한 것이 눈에 보여 빨리 티켓을 예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느긋한 AK 가 먼저 나서서 티켓 예매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내가 스케쥴이나 여정에 대해 물어볼 때 잘 답해주고, 결정을 내어 내가 빨리 예약을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를 본 후 저녁에 잠깐 전화를 달라는 나의 말에 내가 그냥 예약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약간 서운했다.
여행가는 말도 내가 꺼내고, 여행 계획도 내가 세우는데 잠깐 통화하면서 기차 시간 조율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별 일은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 서운한 마음에 꿍해있고 싶지 않아 티켓 예매를 마치고 AK에게 문자를 보냈다.
" 누가 예매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근데 우리가 처음 가는 여행인데 니가 신경을 쓰지 않는 거 같아서 조금 실망했어. 나만 여행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느낌이야. 잠깐 통화하면 해결됐었을 일인데."
무슨 이런 일로 그러냐고 경악을 하거나 귀찮아 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을 했으나, 이런 작은 일들이 쌓이면 나중에 쓸데없이 커질 수 있어 표현하는 게 좋다고 생각이 들어 전달한 것인데. 웨인이 듣더니 아직 그런 심각한 말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단계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르고 나중이고의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존중할 사람이라면 한 번을 만나도 그럴 테니까.
다음 날 AK에게 답장이 왔는데.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 니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한 걸 공유해줘서 고마워. 어제 늦게라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까먹었네. 다음엔 내가 조금 더 신경쓸께.
이렇게 예쁘게 말을 해서 보고 바로 기분이 풀렸다. 뭐 삐지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직관력이나 감성지수가 높아도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생각이나 감정을 모르는 일이 많다. 특히 인간관계 갈등을 싫어하는 ENFP & INFP 는 더욱 그런 갈등을 웃어 넘기거나 피해버리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꿍해있을 일이라면 솔직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지나가면 다음에 또 반복되지 않을 수 있고 내 감정을 이해받는 느낌이 되니까.
점차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게 느껴진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가 그랬듯이.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출처: 어린 왕자 중에서. 생텍쥐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