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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위한 괴물 같은 예술혼

<국보> 리뷰

by 또또비됴

1,200만 관객 동원. 170억엔(한화 약 1,600억원) 돌파. 한마디로 <국보>는 일본 박스오피스를 씹어 먹었다. 이 작품의 흥행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 -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 이후 22년 만에 실사 영화가 100억엔을 돌파한 것. 일본 영화 최초로 재일한국인 감독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 그리고 영화 소재로 구현하기 힘든 가부키를 선택해 흥행했다는 것이다. 안전함 보다는 도전을 택한 영화는 결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기 위해 도전한 키쿠오와 슌스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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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났다. 나가사키 지역 야쿠자 조직의 두목 아들인 키쿠오(쿠로카와 소야)는 가부키 연기에 무한한 재능이 있다. 우연히 소년의 연기를 본 가부키 명문가 수장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가 인정할 만큼. 그게 운명의 시작이었다. 라이벌 조직의 기습으로 아버지가 죽은 뒤, 오갈 때 없는 이 소년을 거둔 사람이 바로 하나이 한지로였으니까. 그는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키쿠오를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고, 이 두 소년은 라이벌이자 동료로 지내며, 최고의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성 배역을 맡는 남성 배우)를 꿈꾸며 성장한다.


언뜻 보면 <패왕별희>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출을 맡은 이상일 감독은 <패왕별희>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국보>는 <패왕별희>보단 <블랙스완>이나 <서편제>와 닮아있다. 의도적으로 일본 역사와의 접점을 크게 키우기보다는 예술가로 성장하는 두 인물의 인생 고난사에 더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삶 속 휘청거림이 역사가 아닌 개인의 운명에 기인하는 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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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오는 야쿠자의 자식이라는 낙인과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재능을, 슌스케는 가부키 명문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실과 이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재능과 피는 이들에게 빛과 어둠 같은 존재인데, 흥미로운 건 이 존재가 각자의 삶에 흥망을 전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암시하듯 키쿠오를 처음 본 당대 제일의 온나가타이자 인간 국보인 만키쿠(다나카 민)는 아름다움이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이내 본인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된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재능과 피로 인해 가부키 세계를 한 차례씩 떠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가부키 무대에 오르는 계기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키쿠오는 스승의 선택을 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만, 이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어떻게든 다시 가부키 무대에 오르기 위해 가족을 버린다. 슌스케는 키쿠오에 밀리고 아버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나락의 길을 걷지만, 가족을 위해 다시 가부키 무대로 돌아온다.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상반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가 가진 재능과 피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신을 갉아먹더라도 예술의 혼을 다하고 못 이룬 꿈을 위해 모든 걸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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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들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걸 버리는 두 주인공의 삶은 한편으로 이해되고 다른 한편으론 애처롭다. 이들이 갖고자 하는 최고의 온나가타는 인간으로서 특히 남성으로서 이루는 게 어렵다. 남성이 여성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든 그 경지에 오르려고 하고, 이를 위해서 토키오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처럼, 가족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는 등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의 모습은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의 경외심을 높인다. 한마디로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자신의 영혼을 기꺼이 헌납할 정도가 되어야 가까스로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높은 벽을 보여주면서 예술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향한 탐구를 지속한 이상일 감독은 가부키 배우를 통해 아름다운 예술의 추악하고도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마치 더러운 연못에서 연꽃을 피워내듯 진흙탕에 구르는 듯한 인생사를 겪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을 보여줄 수 있는 사실을 주인공들을 통해 드러낸다. 더불어 키쿠오를 통해 재일한국인으로서 살아왔던 삶을 투영하며 오로지 피가 아닌 재능으로서 증명해야 하는 경계인으로서의 불안한 삶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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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시간의 길고 긴 러닝타임이 진입장벽으로 보이지만 자리에 앉으면 시간 순삭이다. 대하드라마 뺨칠 정도로 약 50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도식적으로 표현되는 몇몇 장면들과 설정들은 눈에 밟히지만,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절로 마음을 움직이고 함께 걸어 나간다.


이야기 뿐이겠는가! 영화의 또 다른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가부키 공연 장면은 <국보>의 무기다. 성년이 되어 첫 무대로 선보이는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를 비롯해, 라이벌이자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보여주는 ‘도죠지의 두 사람’,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게 하는 ‘소네자키 동반자살’, 그리고 국보의 자리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외로움의 고통을 표현하는 ‘백로 아가씨’는 눈을 뗄 수 없다.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를 제외한 공연들은 초반과 후반에 나오는데, 무대에 오른 주인공들의 나이와 인생사를 생각하며 비교해 보면 그 감흥이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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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영화의 빛나는 지점은 편집이다. 중요한 사건마다 교차편집으로 키쿠오와 슌스케의 얄굿은 운명 관계를 보여준다. 키쿠오에 좋은 일은 슌스케에게 나쁜 일인 상황 속에서 감독은 편집으로 이들의 반대되는 인생을 보여주고, 결국 동료지만, 하나의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걸 계속 강조한다. 더불어 드라마 8부작으로도 생각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3시간으로 압축한 스토리를 보다 임팩트있고 간결하게 축소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서도 그 역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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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자와 료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슌스케 역의 요코하마 류세이도 호연을 펼쳤지만, 극의 중심을 갖고 끝까지 아름다움을 보고자 했던 키쿠오의 인생사를 보여준 요시자와 료의 연기는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재능은 있지만, 그만큼 불안에 잠식하는 키쿠오의 내면, 더불어 어떻게든 가부키 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해 사는 기구한 운명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1년여 넘게 훈련 받은 가부키 연기도 탄성을 자아낼 정도. 우리에겐 <킹덤> 시리즈 등 장르 영화로 잘 알려진 배우지만 작년 탁월한 수화 연기를 보여준 <내가 살아가는, 두 개의 세계>로 제16회 TAMA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올해는 <국보>로 동일한 영화제에서 2년 연속 남우주연상 수상이란 쾌거를 올렸다. 그동안 이 배우의 존재를 몰랐다면 이제 기억해 보자.


<국보>를 이루는 색은 붉은색과 파란색일 것이다. 예술을 향한 열정의 붉은색,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파란색. 뜨거움과 차가움(또는 외로움)이 공존하는 영화는 저절로 양가적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소피안 엘 파니 촬영감독이 참여한 듯 하다.) 옳지 못한 선택을 하고 지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어떻게든 정상의 자리에 서고 싶었던 그의 갈망.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닐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박수를 보낸다.


사진 출처: 미디어 캐슬



평점: 3.5 / 5.0
관람평: 아름다움을 위한 괴물 같은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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