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보다 나를 먼저 배려하고 챙기는 것이다.
겨우 열입곱번째 글, 나는 글쓰기 왕초보다.
5년 10년 브런치 마을을 일궈 오신 작가님들 시선에서는 나는 그야말로 아장아장 신출내기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님들에 관한 내 생각이 일부 담길 오늘 나의 글은 조금 더 조심스럽다. 그래도 기왕 든 마음, 솔직하게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아직 영글지 못한 생각조차도 품어 주는 곳이 이 곳 글사랑방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지금 일체의 SNS 활동도 안 하고 브런치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무명씨이다.
이곳이 어떤 작가님들이 어떻게 글쓰기를 나누는 공간인지도 잘 몰랐다. 혼자 부풀린 잡념을 글로 썼다가 찢었다 한 적은 있으나 내 글을 누구 앞에 내놓은 적도 없었다. 어쩌다가 글쓰기 바람이 들어 버렸다.
그저 쓰고 싶었다.
내 마음의 대나무숲도 필요했고 내가 나를 바라봐 주고 써 주는 공간을 원했다. 찾아보다가 브런치를 택했다. 그런데 이 곳이 어떤 시스템의 글터인지 잘 모른다. 브런치북, 매거진, 멤버십 구조도 아직 생소하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 애도 아닌데 누가 떠 먹여 줄 일도 아니고 내가 찾아보고 스스로 택해야 하겠지만.
짐작을 뛰어넘어 훨씬 많은 분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 삶을 걸고 온 마음을 바쳐 분투하며 쓰시는 분도 계시고 유용한 지식이나 단상 하나도 혼자 곱씹기 아쉬워서 기꺼이 나눠주는 글도 많다. 아직 많은 작가님들의 글을 만나지는 못하였기에 딱 집어 정리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그저 쓰고 싶어서 시작한 내 마음이 약간 만용인가 결례인가 헛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마 떼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이곳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배려』다. 나중에 더 깨닫고 수업료를 치러야 할 것들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브런치 초심자 입장에서 지금까지는 그렇다.
서점의 종이냄새 나는 책과는 느낌이 다르다. 글쓰기는 응축된 정성이라고만 여겼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것은, 단순히 작가의 필력과는 별개로 그 사람의 생을 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디서 글쓰기를 해볼까?' '나도 책이나 한 권 내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생기더라도, '나의 세계'가 없다는 부끄러움이 들어서 멈추곤 했다. 그런 생각은 아직 여전하지만,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보고 배우면서 얻는 생각은 조금은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날것의 글들이 참 좋다. 떠 오른 생각 즉흥적으로 무질서하게 쓴 날것의 의미가 전혀 아니다. 몇 구절의 짧은 글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정성을 다해 수정하는 시간을 거칠 테니까.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 감정의 파고 정리를 책의 교정과 비교하면 브런치 글이 '지금 이 순간의 그분'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작가님들이 마치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느낌이 더 든다. 때로는 단번에 정교하게 가다듬어진 백자 같은 글에서도, 때로는 즉흥 환상곡처럼 숨김없이 드러낸 질그릇 같은 글에서도 작가님들의 생각 사계절이 느껴진다. 이런 곳이 아니면 남의 일기를 합법적으로 훔쳐보는 듯한 선물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작가님은 '지금 내 마음, 이렇게 숨김없이 막 써요!' 하는 식으로 써 내려갔지만, 그 속에도 알토란 같은 배움과 통찰이 많이 있다. 밤나무 숲에서 알밤을 까보라. 까는 족족 알밤만 나올 때의 감동보다 가시 찔려가며 까는데 한참 후에 데따시 큰 알밤 하나가 이슬 머금듯 쏙 빠져나올 때의 감탄은 정말 크지 않나. 이곳 작가님들의 그런 글들도 눈에 띈다. 범접할 수 없는 좋은 글이어서 긴 호흡으로 한 글자씩 새겨야 하는 글들도 많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브런치에서 작가님들의 글을 접하면서 배운 것들 중 『배려』를 꼽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사실, 올해 들어서 배려라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일과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은데 상대방의 손바닥과 어긋나서 소리가 안 나는 듯한 관계들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브런치 입문 후에 '배려'라는 주제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새겨보는 기회를 준 글들을 접했다. 배려를 직접 주제로 한 글은 아니었지만 배려가 중간중간 묻어나는 글들도 있었다.
공감이 감수성이라면 배려는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다. 덧붙여, 원론적인 배려의 정의는 나의 수고로움이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타인의 편리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무용지물이고 어디까지가 과유불급인지 선을 긋기가 어려운 것이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브런치에서 '배려'의 정의와 방향에 대해서 새롭게 길을 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꺼이 타인의 편익을 위해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존중하고 먼저 지킬 수 있어야만 진짜 배려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자존, 존중, 성찰이 없는 배려는 자칫 껍데기가 되고 가식이 되기 쉽다. 나를 먼저 존중하고 보듬지 못하고, 타인의 심리경호를 우선하다 보면 정작 나는 늘 소모되고 피로해질 수 있다. 연극이 끝나고 불 꺼진 무대가 보람이 아니라 피로하고 외롭기만 하다면? 관객만 행복한 공연이면 뭔 소용일까? 그런데, 브런치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존중과 자존을 추스르고 나누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작가들끼리 작은 배려를 나누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종국엔 그 행복한 자존이 타인과 세상을 향한 더 큰 배려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백분지 일 천분지 일의 가능성으로 그렇지 않은 분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 백 프로 순금은 없으니까 이곳은 순도높은 배려 훈련터라는 생각이 든다.
엄청 민망했던 나의 경험을 『배려』라는 주제에 끌어와 본다.
가족 외에 작심하고 서로 방귀를 터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생리현상 통제 실패로 혼자 일방적으로 풀피리 소리를 분출한 경험은 있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서로 텄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쌍방 경험은 희귀할 것이다. 나는 있었다. 지금은 퇴임하신 지 한참 된 회사 대표님이었다. 그 괴이한 경험의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그 분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다. 그분께서 술 한 잔 사시겠다고 다른 직원까지 포함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다른 직원이 약간 늦게 도착해서 먼저 도착한 우리 둘이 먼저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좀 많이 불편했다. 사적 친분도 낮았고 형식과 의전을 중시한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대표이사라서 더 불편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황당하게도 내가 그만 엄청 크게 "뿌웅~"하고 방귀를 터뜨리고 말았다. 짐작으로는 유난히 방귀가 잘 나오는 비타민제를 잘못 먹었던 후과였지 싶다. 그렇지만 그런 의전 자리에서조차 못 참을 수준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그 순간의 황당함과 부끄러움이란 ㅠㅠ
"앗~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자 이내 그분의 답변은, "우주의 섭리인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낮에 건강한 음식을 먹었나 봐. 하하하" 그런데, 그분의 후속액션(?)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뿌~~~웅~~" 그분도 방귀를 일부러 힘차게 뀌시는 거였다.
"이제 우리 둘은 서로 방귀를 튼 사이인 거야~"
"앞으로 ○부장도 그에 걸맞게 나한테 편하게 대하고 회사발전을 위한 제언을 직언해도 돼"
그 방귀 한 방으로 많은 게 달라졌다. 권위의 장벽이 스르르 흐려지고 평소 그분의 지론이 말랑말랑하게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 생각보다 소탈하고 인간적이시구나.'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부하직원을 안심시키려고 배려하신 거였구나.'하고.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부분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배려였다. 하지만 그분이 과연 오직 부하직원 한 명의 편익(?)을 위해서만 자신의 그 큰 체신과 아우라를 기꺼이 깎아먹는 선택을 하신 걸까? 작은 미담의 훈훈함이 방귀 폭발시킨 대기업 대표이사 '영' 추락을 뛰어넘을만한 거였나? 내가 그 정도로 귀한 부하였나? ㅎㅎ (물론, 난 그 이후 입 꾹닫했긴 했다.)
요즘 다시 생각해 본다. 그분의 그 폭발 자신감에는 자존, 자기애, 자기 효능감의 바탕도 있지 않았을까? 자기와의 대화와 성찰을 끊임없이 이어가면서 쌓아올린 자존과 자신감이 없다면 어찌 그런 배려(?)가 나올 수 있었을까?
다시 브런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런 거라면 많은 브런치 작가님들도 지금 열렬히 배려 중인거다. 자기 성찰의 배려, 자기 존중의 배려, 자기 사랑의 배려를 글쓰기로 열렬히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배려의 힘이 결국 타인에 대한 거짓 없는 배려로 향할 것이다. 지치지 않고 소모되지 않는 서로서로 배려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적자생존! 잘 적는 사람이 잘 생존한다는 말이라고 바꿔서 생각해 본다. 나를 마음에 잘 적고, 그 마음을 글로 잘 적고, 타인의 좋은 글도 내 마음에 잘 적으면 그것이 거짓없는 타인 배려의 준비와 출발이 아닐까? 그래서 드는 마음을 글로 적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