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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품앗이가 주는 행복감

남을 인정해 줄 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공

by 꿈꾸는 아재

고단한 삶에 마음이 짓눌리는 날이 오면 가끔 못난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내 삶은 거대한 세상 공연에서 조조연급이나 병풍 역할 정도에 불과한 것인가? '


재주는 내가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 듯한 배신감이 크게 저며올 때 가장 그랬다.

페어플레이 하면서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뭔가에 뒤통수 크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그랬다.

그럴 때면 시쳇말로 일할 맛이 쪽 가신다. 곧바로 공정과 공평이라는 말에 회의감이 밀려온다.


아주 가끔 찾아왔지만 일단 한 번 오면 독감처럼 마음을 좀 앓았다. 절친한테 이 앓는 소리로 하소연하면 "닥쳐라 쉐이야!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는 타박이 올 때도 있다. 맨주먹으로 인생을 일구다 보니 어쩌다 오는 개기일식 같은 부작용이라고 조언도 보태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이 칼에 베인 상처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서 그럴 때마다 나는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나의 경험으로는 조연으로서의 소외감은 큰 것도 있었지만 작은 것들의 누적 타격감이 더 컸다. 마치 권투경기에서 큰 훅 한방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잘한 잽을 맞으면서 버티다가 침몰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자잘한 잽은 상당수가 '인정욕구' '비교심리' '질투심'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마치 에프킬라를 뿌려도 죽지 않고 밤새 앵앵거리는 모기처럼 질긴 감정 같은 거였다. 누군가는 '그깟 걸로 그리 서운하고 세상 혼자된 느낌인가?' 싶겠지만, 막상 당하면 푸쉬킨의 詩를 질겅질겅 씹을 정도였다.


올봄에 내가 직속 아래 직원에게 지혜롭지 못한 처신을 한 적이 있었다.

일도 센스 있게 잘하고 동료관계도 좋은 여직원 ○차장이다. 솔선수범의 전형이라서 프로젝트를 맡겨도 손들고 PM을 자청하는 스타일이다. 좋은 매너로 평판도 좋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직원의 태도가 좀 달라졌다. 나한테 분명 뭔가 크게 서운한 일이 있다는 직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더 정중하게 대했으나 감정의 온도는 싸늘해졌다. 할 일은 정확히 했으나 솔선은 사라졌다. 불손하지 않되 격 높은 토라짐이었다. 에이스 직원의 열정 저하는 음으로 양으로 사무실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업무 진도나 성과도 낮아졌다.

원인은 내가 과거에 간혹 느꼈던 소외감, 열외감 비슷한 거였다. 상황을 파악한 후 나는 바로 사과했다.


몇 달간 진행된 전사 프로젝트 후 경영진이 참여한 리뷰 발표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발표를 내가 했는데 PM으로서 전체 프로젝트를 주도한 ○차장의 언급이 빠져 버렸다. 대신, 평소 그 직원과 경쟁관계였던 다른 직원의 이름이 일부 장표에서 언급되었다. 사려깊지 못한 나의 발표였다. 가장 주도적 공헌을 했던 주연을 이름 없는 병풍으로 소외시켰으니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게다가 경쟁하던 직원의 언급까지.


관계를 회복한 후 ○차장은 나에게 정중히 말했다. '존재감 부재'와 '비교당함'에 상실감이 너무 컸다고.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는 PM인 ○ 차장을 중심으로 전 직원이 하나 되어 만든 결과였다."라고 PM 언급 그 한마디를 원한 거라고 했다. 몇 달간 쏟아부었던 자신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일할 맛이라는 건 작더라도 주연 역할 인정 해주는 맛이다. "그깟 작은 일로 그래?"라고 했다간 큰일 날 소리다.

자신의 노력이 무대 밖으로 밀려나는 소외감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리라던 다짐을 다시 상기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인간은 누구나 주연이 되고 싶어 한다.

대하드라마 같은 큰 서사가 아니라 단막극이어도 상관없다. 출연하는 인생 합동공연에서 무대의 병풍이 되거나 무대 밖의 출연 대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인정받고,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얼마나 많은지 정량적으로 잴 수는 없지만, 솔직히 나도 많다. 예전에는 애써 눌러 담았지만.


그거 덧없는 거라고, 누구의 시선과 평가에도 굴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소의 뿔 들고 속세를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관종이라고 표현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 직장생활 30년 해 보니까 그게 참 중요하더라.

물론, 남의 시선과 칭찬 그 자체에 목을 매라는 것은 아니다. 바른 마음 가치가 없으면 허무하기도 하니까.


널리 알려진 방법이지만 오랜 직장생활에서 적용했던 내 나름의 노하우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먼저 주변 사람들을 소소하게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주연 품앗이'다. 내 호의에 입 싹 닦는 무뢰한이 아닌 이상, 상대는 대체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호의로 되갚는다. 그것이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강조한 '상호성의 원칙 (Reciprocity Principle)이다. 상호성의 원칙을 대전제로 한 내 소소한 노하우의 요약은 이렇다.


○ 벤치마킹 온 경쟁사 직원이 돌아간 다음 해당 부장에게 전화해서 우회 칭찬한 사례

"벤치마킹 보내신 A과장은 제가 욕심낼 정도의 인재더군요. 태도도 통찰력도 어마무시하던데요. 어디서 그런 역량을 배웠냐고 했더니 자신의 부장님한테 배웠다더군요. 청출어람이네요." ⇒ 심리학에서 말하는 제 3자 효과 또는 귀인 이론의 한 방법이다. 우회 칭찬을 통해 해당 부장과 A과장을 동시 주연으로 만들어 주는 일타쌍피 효과다. 경쟁사임에도 불구하고 향후 업무에 둘 다 적극적 우호 군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 나한테 평소 반감이나 서운함을 가지고 있던 직원을 주연으로 만들어 주고 신뢰 회복한 사례

나를 싫어하는 해당 직원에게 (야구 기습번트처럼) 의외로 훅 치고 들어가서, "나를 향한 사적인 불편함은 존중한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하고 싶다. 잠시 후 회의시간에 업무성과에 가장 모범이 된 당신의 사례를 소개할 것이다. 내 사적인 불편이 당신의 큰 공적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미리 얘기한다."라고 말하고, 공적으로 전 직원 앞에서 업무 칭찬 해주면 그다음은 게임 끝이다. (의문이면 실험해 보시라.)


○ 다수의 칭찬을 나열한 다음 그중 주연급으로 만들어 주는 칭찬으로 키맨 만든 사례

"선배님! 지난번에 추천해 주신 그 방법을 이번 프로젝트에 적용해 봤는데 완전 최고던데요. 다른 선배들이 추천해 준 방법들도 정말 배울 점이 많았는데 선배님 아이디어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일은 상사가 직접 다 했더라도 아래 직원의 공으로 돌려주면서 부하의 신뢰를 얻는 사례

보고 납기시한으로 인해 지체할 수 없거나 불가피한 사정상, 자료를 상사인 내가 직접 다 만들었더라도

경영진이 나에게 "이 좋은 자료 누가 만들었냐?"라고 물어보면, "이 자료는 저희 부서 에이스 B과장이 만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만들었어야 할 실무자에게는 내가 만든 자료의 제작과정을 세세하게 전수한다.


사례를 더 많이 나열하고 싶으나, 더 길어지면 읽기를 멈추고 나가버릴까 봐 서둘러 마무리를 해 본다.


내가 상대방을 주연으로 만들어 주면 상대방이 되갚는 결과는 얼추 비슷했다. 직장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된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우리들의 자발적인 홍보대사가 된다. 사람에게 진심 어린 감정적 투자를 하게 되면 주식투자처럼 쉽게 투자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신뢰하는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방탄조끼를 자처한다. 우리의 성공이 곧 그들의 성공인 것처럼 점점 서로를 일체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강력한 정서적 기억과 구전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주연 품앗이'가 선순환으로 돌고 돌아 확산되는 긍정효과가 복리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확장이다.


브런치도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 읽으면 마음에만 새기지 말고 공감 바구니 하나 꺼내 들고 작가님 댁에 마실 가는 거다. 라이킷과 댓글 하나 작가님 대문 앞에 남겨 놓고 오면 그것이 '주연 품앗이' 아닐까? 그러면 그 주연 작가님은 또 다른 주연 품앗이를 더 많이 하고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더 키우리라.


자기 고양(Self-enhancement)이라는 거 별거 있을까? 남을 인정해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주인공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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