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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로 Oct 21. 2021

방충망

벌레 한 마리가 집에서 발견됐다. 크기가 내 새끼손가락쯤 될 정도로 큼지막한 놈이었다. 머리, 가슴, 배가 모두 거무튀튀해 위협적이었다. 벌이라고 하기엔 날렵하고, 모기라고 하기엔 육중했다. 벌레는 베란다 창문과 방충망 사이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기에 들어갔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저곳에 갇혀있었을까. 어쩌면 수일, 수개월째 저 좁은 곳에 갇혀 있다가 이제야 내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참을 지켜봤다. 방충망에 혹시나 틈이 있을까 기대하는 듯 벌레는 방충망에 매달린 채 그 위를 기어 다녔다. 가로 방향으로 이쪽저쪽을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수일 또는 수개월을 다녔을 법한데도 녀석은 그 지루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지쳐서 죽을 판이었다. 녀석은 파리처럼 앞다리를 비비기도 했다.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측은해졌다. 자유롭게 날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다가갔다간 쏘일 수도 있다. 옷장에서 긴 옷을 꺼내 입었다. 모자까지 썼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긴 옷을 입으니 온몸에서 땀이 솟구쳤다. 그래도 벌레에 쏘여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베란다로 나가서 창문을 열고 방충망도 열었다. 이제 벌레가 방충망에서 떨어져 나와 바깥세상으로 날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벌레는 그러지 않았다. 방충망 위에 붙은 채 좌우로 기어 다니기를 반복했다. 답답했다. 방충망을 흔들고 파리채를 흔들어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벌레는 방충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너무 오랜 시간 갇혀있는 바람에 방충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이미 잊은 듯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게 해주려 파리채를 흔드는 순간 비극이 벌어졌다. 내가 휘두르던 파리채에 눌린 이 녀석이 죽고 만 것이다. 도대체 벌레는 왜 그랬을까?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는 바람에 그 공간을 벗어날 방법을 잊었을까, 아니면 벗어날 용기를 잃었을까? 결코 뚫리지 않을 방충망 위를 기어 다니면서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탈출구를 꿈꾸던 나머지 망상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을까? 


좁은 생각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현실에 적응한 인간은 그 현실을 뛰어넘는 사고와 행동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확증편향과 경로의존성에 함몰된 인간은 좀체 자신이 만든 틀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1997년 한국을 덮친 외환위기는 한국인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일본식 자본주의에 익숙해져있던 한국인은 그때를 기점으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바다에 내던져졌다. 국제통화기금이 한국에 강요한 것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급속도로 이식하기 위한 조치였다. 자본시장 전면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등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노동자보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미국식 자본주의가 갑자기 이식된 것이었다. 이후 20년에 걸쳐 한국은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방충망에 매달린 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이 와중에 실업률은 올라가고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젊은이들과 기성세대는 일자리를 놓고 밥그릇 싸움을 하는 신세가 됐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상식이 되면서 사회 구성원간 반목과 불신, 갈등은 심화됐다. 총기가 규제되고 있기에 망정이지 미국처럼 총기가 자유화돼있었다면 어쩌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돈과 일자리 문제로 인한 총성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금융회사들은 물귀신이 됐다. 언제든 한 번만 실패하기라도 하면 금융회사들은 그 기업을, 그 사람을 물귀신처럼 끌어당겨서 재활불능 상태에 빠뜨린다. 돈을 빌려주면서 성공할 수 있다고 유혹하던 금융회사는 고객이 망한 직후 비열한 샤일록으로 변신한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해 파멸시키려던 사이렌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이처럼 처참한 현실에 직면하고도 한국과 한국인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위험천만한 방충망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현 경제체제 하에서는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봐도, 이 정책을 시행해보고 저 정책을 시행해봐도 별 도리가 없다. 성장동력은 사라지는데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작은 파이를 나눠 먹으려다보니 구성원들 간 싸움은 더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방충망과 함께 한국인을 좁은 영역에 가둬놓는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운용해왔던 북한은 한국에게 오랫동안 결코 가까이 가선 안 될 존재였다. 한국에서 시장의 효율이 아닌 공공성과 평등, 분배를 주장하는 순간, 이는 친북이자 빨갱이로 낙인 찍혀왔다. 보수진영은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고 이 서슬을 피하려면 누구든 시장주의자임을 억지 고백해야 했다. 사유재산과 사익이 아닌 공공과 공익을 외치던 이들은 여전히 반체제 인사라는 의심을 떨치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설령 남북통일이 되더라도 뿌리 깊은 색깔론과 레드컴플렉스는 우리 민족을 갈등과 반목으로 내몰 것이다. 방충망에서 떨어지지 못했던 우리 집 벌레처럼 한국인들은 여전히 미국식 자본주의에 매달린 채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에 시달리며 지금과 같은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날아가지 못하는 벌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국가인 스웨덴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민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하고 있다. 스웨덴은 자본가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금은 저소득층의 재도전을 위해 쓰인다. 빈부격차가 작은 데도 사회와 경제 곳곳에서 혁신이 이뤄지고 있다. 공짜로 퍼주면 게을러진다는 시장주의자들의 어설픈 가설은 스웨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살인적인 경쟁에 뛰어들지 않아도 스웨덴은 잘 돌아간다. 스웨덴 노동자와 사측은 서로를 배려하면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한국 노사처럼 서로를 죽일 듯이 덤벼들지 않아도 스웨덴 노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인간적인 스웨덴 모델 대신 비인간적인 미국 모델을 받아들인 한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돈과 사람 중에 돈을 선택했던, 아니 강요당했던 한국은 이제 그 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처지가 됐다. 과연 지금의 한국과 한국인에게 미국식 자본주의 아닌 다른 대안을 생각할 여력과 정신적 여유가 있을까? 지구 저편에 전혀 다른 방식을 쓰고도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더 잘 사는 스웨덴이 있는데도 지금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지금의 비인간적이고 처참한 경제체제와 사회구조 속에서 이득을 보는 최상위계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최상위 계층을 동경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본 예비군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돈이 없어 허덕이든 말든 자기만 배불리 먹고 편히 살면 된다는 사람들, 당장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는데 복지병 운운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한 우리 앞의 방충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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