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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치 Sep 19. 2021

쓰는생활

20210311 자전거

오늘 자전거 가게에 자전거를 맡겼다. 2017년 6월부터 2021년 3월까지 한 번도 타지 않다가.


17년 6월 초 어느 날 평소처럼 자전거를 굴리며 하교하던 중, 얼굴로 갑자기 큰 벌레가 날아들었고 놀라 핸들을 확 꺾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전봇대에 부딪친 얼굴은 멍이 들고 터지고 여기저기 까졌다.

그 전봇대 바로 옆에 소화전이 있었던 게 잘 타고만 다니던 자전거를 못 타게 된 이유였다.


오늘 다섯 시에 퇴근하곤 선유와 쫄레쫄레 예전 집으로 갔다. 이사할 때 깜빡하고 자전거를 못 챙긴 탓이다. 아휴, 먼지가 뽀얀 정도가 아니다.


비밀번호 기억나?

그 말에 무릎을 굽혀 자물쇠를 만져본다.


번호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다.

번호를 따로 변경할 수 없는 자물쇠여서 늘 끝자리만 살짝 돌려놨었는데.

누가 가져가려고 여러모로 건드려 봤나보다.

아이씨. 욕이 절로 나온다.

자전거 도둑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한창 학원가에 위치한 매장에서 일할 때는 자전거 벨과 전조등도 없어졌었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아, 그냥 끊어달라구 하자!


끊어달란다고 끊어주나?

안 되면 자전거 사진 예전에 찍은 거 보여주지 뭐...


고민이 무색하게 철물점에서는 몇 번의 질문 후에는 뚝, 하고 간단하게 끊어주셨다. 얼마예요? 에이 그냥 가.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며 다른 거라도 사가겠다고 쭈뼛대며 말을 얹으려는 형국에 선유가 감사하다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한다.


떡국을 열 번은 더 먹은 게 이런 데서 빛을 발하나?


안 보이는 어딘가가 다 터져버린 것 같은 자전거를 데굴데굴 굴리며 자전거 가게로 향한다.

2015년 3월, 자전거를 샀을 때도 두어 번 방문했었다.

사장님 그때도 할아버지였는데 이젠 완전 더 할아버지시네요.

저는 벌써 2학년 8반이에요.


팔호광장에 위치한 자전거 가게는 사장님 아저씨가 그다지 나에게 관심이 없는 점이 맘에 들어.

다니던 곳만 다니는 습관이 있는데 그건 사장님이 나를 통 못 알아보실 때 더 빛을 발한다.

알아보셔도 되지만... 못 알아보실 때가 제일 좋아.


사장님 아까 전화 드렸었는데, 이래이래서 저래저래서 자전거 좀 고치고 싶어서어...

에그 망가졌으면 사지 뭘 고치구 그래요.

그래도 정들어서 고쳐보려구...


그러자 좀전에 선유가 자전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얼마에 샀냐고 물어본 게 생각났다.

30만 원 좀 넘게... 근데 이젠 팔지도 않어.

철물점 가서 자물쇠 끊고 자전거 고치고 하면 비슷하게 나오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니, 그 얘기가 현실이 된 건가? 언뜻 봐도 내가 탈 만한 애매한 자전거들은 취급하지 않는 이 작은 가게에서 자전거를 하나 골라야 할 판인 건가? 전기자전거 사는 건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면서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두고 가고, 삼만 원이에요.

네?


지금 제 자전거를 삼만 원에 폐차하시겠단 얘기?


내일 아침엔 돼요. 이거 갈고, 세수도 시켜주고.

그게 삼만 원이에요?

응.

사장님 왜 그거 밖에 안 받으세요?


노년의 기술자 분들이 현재 시세보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할 때 나는 아주 복합적인, 누가 보면 웃길 만한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친다. 누가 누굴 걱정해. 야, 허세 떨지 말고 알겠다고 해, 아니 나는 아직 생생해서 돈 벌 날이 많잖아, 야 너 지금 누굴 뭘 보고 판단해, 편견 쩌네 진짜. 사장님 건물주 분이면 어쩔 거야, 아... 그런가...


대신 뒤에 요고요고, 후미등이랑 자물쇠까지 해 주세요.


아아. 단돈 사만 사천 원에 다가오는 봄날을 열고, 무한정 달릴 힘을 얻게 된 거다. 꼭 청춘 만화처럼.

자전거가 잘 고쳐졌으면 좋겠다. 셀프 세차장에서 세차해도 되는지 궁금해하다가... 괜한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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