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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Jan 20. 2024

병상에서 2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 가신 김할머니

존엄한 죽음에 대한 질문을 유산으로 남기다

요즘 TV에서는 '이것은 인생의 마무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 인생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배우 오연수 씨의 나래이션으로 시작되는 짧은 광고가 나온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권장하는 캠페인 광고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는 지난 2018년 시행되었고, 2023년 10월에는 참여자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물론 의향서 작성은 존엄한 죽음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 중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렇게 사회가 존엄한 죽음과 연명의료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된 데는 '김할머니 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현재의 '연명의료결정법'이 만들어졌고, 지금 국회에는 소위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어 있다. 죽음의 문제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자기결정권의 문제이다.  자신이 그리고 사회가 어떤 선택과 역할들을 할 때 우리가 좀 더 인간적으로 살다 갈 수 있을지를 더 근본적이고 더 폭넓게 고민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 과정에서 ‘김할머니 사건’을 되짚어보는 것은 첫걸음으로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2008년 2월, 76세의 여성이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위해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 중에 출혈이 심해서 뇌가 손상되었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회생 가능성은 없었다. 의료진은 환자와 가족이 전혀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판단했고, 자칫 의료과실 소송으로 이어질까 우려해서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중환자실 입원이 3개월 정도 되어가자 가족들은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평소 원하지 않았다”며, 인공호흡기 등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병원은 이를 거부했고, 1년여간의 법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5년 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숨질 때 할머니가 연명치료를 반대했던 것을 본인의 의사로 추정했다. 국내 처음으로 ‘연명의료 중단’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또한, 관련 법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판결에 따라 병원 측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었다. 의료진은 할머니가 몇 시간 이내로 숨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스스로 호흡하며 삶을 이어가서 또다시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제대로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진작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생사의 법적 분쟁에 휘말리다 보니 정작 사건의 주인공인 할머니의 삶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 있었나 하는 의문이 나 또한 들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튜브로 영양공급을 받으며 201일을 더 살다가 2010년 1월에 돌아가셨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생명을 이어간 2년여에 걸친 할머니의 삶의 과정을 ‘김할머니 사건’이라고 부른다.      


병원은 왜 법정으로 가야 할 만큼 강경하게 연명의료의 중단을 거부했을까? 이러한 병원 문화가 만들어진 데는 1997년에 있었던 ‘보라매병원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보려 한다.      


‘김할머니 사건’은 의료와 죽음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고, 2016년 [연명의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의료기술의 발전, 여전히 남아있는 처벌에 대한 의사들의 두려움, 최대한의 치료가 최선이라 믿는 가족들, 재택 의료와 돌봄이 어려운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죽음을 앞둔 과잉 의료의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다. 현재 이 법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아주 조금 줄이고, 처벌에 대한 의사들의 두려움을 조금 줄여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법의 제정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 등은 우리들 각자가 원하는 죽음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이고 시작이 반이라니 꾸준히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며, 죽음에 대한 그리고 결국은 삶에 대한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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