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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May 13. 2024

’다르게 생각하기‘가 일구어낸 네덜란드 치매 마을

미소는 돈이 들지 않아요

이 곳이 중증 치매 노인들이 사는 ‘치매 마을’이라고? 노인들이 햇빛 비추는 광장에 앉아서 놀고 있고, 식탁에 둘러앉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리는 ‘중증 치매인’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호그벡 마을광장에는 이렇게 주민들이 앉아서 쉬고 즐긴다. 이곳 주민들은 텃밭을 가꾸고, 교회에 나가고, 시장을 보고, 악기를 다루는 등 자신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앞의 글에 짧게 소개했던 네덜란드 수도 근처의 호그벡이라는 치매 마을 이야기다. 호그벡에서는 ‘음악 치료’라는 말 대신 ‘음악을 즐긴다’고 말하고, ‘병동’이 아니라 ‘집’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지 바람직한 언어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한 시설에 몇십 명이 수용되는 대신 6~7명이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새로운 노년의 가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창립자는 예전에 전통적인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부모님도 자신도 이곳에 오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동료들과 나누곤 했다. 이 문제의식이 호그벡 마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누구든 병동에 살고 싶어 하지 않고, 부엌의 오븐에서 나는 냄새를 원하고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음료를 꺼내 마시는 집을 원한다는 평범한 사실에 충실한 곳, 아마 그 곳이 호그벡 마을인 듯하다. 


물론 집만이 아니라 술집, 슈퍼마켓, 탁구장, 골목, 영화관, 광장 등 우리가 ‘마을’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것들이 갖추어진, 말 그대로 마을이다. 요즘 많이 알려진 살기 좋은 도시 ‘15분 도시’를 이곳 호그벡은 이미 실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립자는 말한다. 호그벡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내 앞에 있는 환자들을 보며 그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기에 가능했다고,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기’는 미소 짓는 것처럼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그래서 호그벡 마을은 특정한 어떤 곳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가능하다고. 


실제 호그벡은 다른 요양원에 비해 예산이 더 많이 들지 않고, 시에서 주는 예산만을 사용한다. 거주자들은 소득 수준에 따라 내는 비용이 다르다. 네덜란드는 노인 빈곤율이 가장 낮은 나라이기 때문에 호그벡 입주를 비롯해서 그들의 노년의 삶을 위한 선택지는 한국의 노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인 듯하다. 


호그벡의 정신을 지향하며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치매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 지자체가 시도한 적이 있으나, 충분히 예상 가능하듯 주민 반대 등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디멘시아뉴스, ‘한국에 없는 마을 ② 전 세계 치매 마을의 롤 모델, 네덜란드의 호그벡) 


아프면, 늙으면, 치매 걸리면, 가난하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 듯하다. 그렇게 보고 배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생로병사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인데,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고작 이 정도인지 나 자신과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지워지질 않는다. 


의사 박중철은 그의 책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에서 ’초라한 삶의 질, 비참한 죽음의 질‘로 우리 사회를 진단했고, 기적을 이루었지만 행복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존엄사‘ ’안락사‘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더라도, 삶이 초라하다면 죽음이 갑자기 존엄하거나 안락해질 방법은 없을 것이다. 


삶의 시작이 돌봄 없이는 불가능하듯 삶의 마무리 역시 따뜻한 돌봄 없이는 초리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노년의 삶과 자연스럽게 이어질 죽음의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관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래서 다르게 생각해야만 하는 과제인 듯하다.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해주지만, 돈 같은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더 많고 더 중요한 것들이 우리 삶에는 깃들어 있다. 


뒤늦게, 더듬더듬, 독학으로 ’다르게 생각하기‘를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 배움의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여러 면에서 나의 눈길을 멈추게 했다. 한국 사회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한 호그벡 주민들의 표정이 그랬고, 부인과 함께 안락사를 선택한 전 총리의 부부의 맞잡은 손이 그랬다. 


높은 곳에 서서 ’겁내지 말고 용감하게 뛰어내려!‘라고 응원 또는 압박을 받는 듯한 느낌으로 나는 우리 사회의 안락사 논쟁을 접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평온한 죽음의 하나로 안락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믿어도 될 듯하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도 생명에 대한 인위적 개입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치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이유로 안락사가 행해지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초기보다 논란은 더 거세지고 있는 듯하다. 


안락사 논쟁을 접하며 내가 갖게 되는 공포심에는 깊은 뿌리가 있는 것 같다. 안락사가 대세여서 또는 앞선 입장인 것 같아서 내 공포심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이 공포의 뿌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공포가 당연히 감당해내야 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등을 생각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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