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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Jun 06. 2024

원래 사람은 밖으로 나가게 마련입니다.

『돌봄, 동기화, 자유』의 저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들

1964년생, 키 163cm, 손발 사이즈는 S, 손바닥은 넓고 두꺼운데 손가락은 짧고 굵다. 몸은 M, 최근 배 둘레가 L 사이즈로 변하는 중이다. 머리카락이 가늘어 기름기가 빨리 끼고, 아침에 있던 볼륨은 저녁이 되면 절반으로 줄어들어 두피가 드러난다. 특히 정수리 탈모가 심해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뒷사람 시선이 정수리로 쏠리는 게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코를 움찔거리는 틱 증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코, 뺨, 어깨와 대퇴부로 그 증상이 확대되었다. 최근에는 턱관절을 딱딱거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 때문에 속귀가 아파도 멈출 수가 없다. 과잉행동증세가 있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면이 있다. 몸은 의욕이 넘치는데 뇌는 느긋해서 이런 증상들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저자 본인은 추측한다.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귀 기울일 가치가 전혀 없는 노인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삶의 핵심들이 곳곳에서 빛난다. 

어느 것 하나 내 스타일이 아니다. 책 제목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 읽었던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요리아이 노인홈의 이야기라니 눈길이 갔다. 큰 기대 없이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다가 홀딱 반해버렸다. 요리아이의 하루하루에는 그 어떤 거대하고 훌륭한 말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의 핵심이 빛을 발했다. 빙그레 웃고 끄덕거리고 가슴이 뻑적지근해지면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책과 함께했다. 


이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요약하기가 힘들었다. 책 곳곳에서 전해지는 감동을 나누자니 책 한 권을 그대로 옮겨쓰게 될 듯했다. 그래서 어렵게 몇몇 풍경들과 순간들을 골라야 했다. 


반신마비인 하나 씨는 앉고 서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제 몸을 씻겨주려 합니다. 

기미에 씨는 자신이 먹다 흘린 음식을 제게 먹여주려 합니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던 요시오 씨는 따라다니는 제게 “자네는 어디를 가고 싶은 겐가?”라며 걱정해줍니다.....

어르신들의 세계에는 ‘나’의 느낌이 흘러넘칩니다. ‘나’의 주관끼리 서로 부딪칩니다. 그곳에는 구령에 맞춰 ‘우향우’를 하지 못하는 ‘나’가 잔뜩 있습니다. 

저자가 표현하는 요리아이의 풍경이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먹기를 거부하셨다. 저자는 이에 대해 올바른 것도 그릇된 것도 아니었다고, 받아들인다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요리아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먹을까’ 혹은 ‘먹지 않을까’ 하는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짓고 할머니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손을 대지 않으면 수저로 입가에 가만히 가져가 보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따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어느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진료하던 의사는 “입으로 먹는 건 자살 행위”라며, 유동식을 권했다. 직원들이 교대로 면회를 가서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는데, 그들 모두의 의견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였다. 가족과 상의한 후 튜브를 삽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10년 넘게 서로의 몸을 동기화해왔다. 이 책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동기화’란, 마치 한 몸처럼 현재의 느낌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이후 5년 동안 할머니는 입으로 먹으면서 살아가셨다. 입으로 먹지 못했던 기간은 임종이 가까워진 며칠 동안이었다. 


“남편이 말이야. 나 보고 ‘미쳤어, 미쳤어.’하는 거야. 너무 분해. 나도 받아치고 싶어. 나는 미치지 않았어. 노망난 거지.”라고 화를 내는 할머니가 계시다. 그녀는 점심을 먹으면 항상 남편을 떠올리고,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신다. 왜 걷는지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지칠 때까지 계속 걸으신다. 할머니와 함께 걷기를 반복하다가 마을의 여러 곳에 들러 할머니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탁은 개인주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웃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돌봄의 문제를 털어놓는 분들도 있었다. 그간 막연하게 느껴졌던 동네에 구체적인 얼굴이 생긴 듯했다. 목적을 잊어버린 걷기가 계속되면서, 마을의 점으로 존재하던 주민들이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버리는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안전’ 장치를 할 수밖에 없다는 지금의 ‘상식’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자유와 안전의 문제에서 최악의 사태를 아예 없애려는 노력이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품어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원래 사람은 밖으로 나가게 마련이고, 노혼(노쇠해져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치매나 인지증 등 질병 취급하는 단어에 반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임을 뜻하는 단어)을 이유로 어르신들을 그 당연함에서 멀리 떨어뜨려도 괜찮은지 묻는다. 당사자에게 비극이란 운 나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속박당하고 가두어져도 저항하지 못한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다. 


늙었다는 이유로, 치매에 걸렸다는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인간이 누릴 기본적 권리를 빼앗아도 좋다고 우리 사회가 무언의 합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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