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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Dec 20. 2022

도대체 캔버스 위에 막을 왜 씌운 걸까?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안개가 낀 것 같이 고요한 느낌을 주는 입체적인 그림. 앞에 그려진 나무는 아주 잘 보이는데, 뒤 쪽의 나무는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불투명한 막이 하나 존재하고 그 뒤로 캔버스가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림에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죠. 요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전시죠? 이기봉 작가님의 10년 만의 전시 Where you stand의 작품들입니다. 



저는 처음 이 작품들을 봤을 때, 도대체 왜 막을 씌운 걸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막 뒤에 있는 캔버스의 그림을 일부러 잘 안 보이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죠. 그래서 저는 그림 가까이로 가서 막 뒤 캔버스에는 어떤 그림이 있나 살펴봤었죠. 실제로 이 전시회를 가면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은 저와 같은 행동들을 보입니다. 그들도 막 뒤 캔버스의 그림이 궁금한 것이죠. 이기봉 작가님이 캔버스 그림 위에 굳이 막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봉 작가님께서 이에 대해 언급한 기사가 있습니다. 22년 11월 21일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기봉 작가님은 이 막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인간이 인식하는 세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는 책의 내용을 '인간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이라는 '막'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사실 들어도 무슨 이야긴지 감이 잘 안 오는데요.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112141351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사실 너무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세세히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쉽게 한 번 설명해보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 언어가 큰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 사실들을 조합해서 세상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그것들을 기억합니다. 그것들은 규정된 이름을 가지고 있죠. 예를 들어서 책상이나 마우스, 컴퓨터, 책장, 침대들은 말로 표현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방을 표현해보라 하면 책상 위에 컴퓨터, 마우스가 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비 물리적인 존재나, 아름다움 같이 수치를 잴 수 없는 것들이 이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적인 사물들이 방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 안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할 때,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어로 표현하고 인식하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막상 우리가 직접 살아가는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리를 좀 해보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적 존재들 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물리적 존재들도 있죠. 


그러니 이기봉 작가 작품에서 막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거나, 한정된 언어, 고정관념, 사회통념 등 '언어로 표현 가능한 세상'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막과 캔버스를 포함한 작품 전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감각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포함된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일 것입니다. 



작품의 막에 그려진 그림들은 굉장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뒤의 그림들은 막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죠. 작가는 우리의 언어와 감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게 왜 문제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기독교인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불교인이 불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남자가 남자의 눈으로, 여자가 여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소쉬르의 언어의 자의성이 생각났습니다. 



언어의 자의성이란, 언어가 생기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의미나 외향적인 모양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맘대로 부르기 시작하면 그것이 언어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책을 왜 책이라고 부르나요? 그냥 엄마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사회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하면 그렇게 부르게 되는 거죠.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언어로 세상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의미 없이 단순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생각 없이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적 세계관 때문에 우리가 정작 살고 있는 세상, 막 너머의 세상을 포함한 전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잘 인식하고 파악하며 살고 있나요? 혹시나 이기봉 작가의 작품처럼 어떤 불투명한 막으로 세상을 덮은 채로 바라보진 않나요? 그리고 그 막 너머의 흐릿한 세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작품 가까이 다가가 내가 가진 막 너머의 세상을 보려고 애쓰고 있진 않나요? 이것이 이기봉 작가가 캔버스 위에 막을 씌운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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