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얘기 잔잔하게 - 016. 나를 가르친 사람이 추천한 책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꽤나 차이가 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 쉽지 않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고전 문학의 가짓수도 대략적으로는 유사할 것이고, 현대 문학이나 서적이 있다고 해도 부모 세대가 즐기기에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QR코드가 가득 들어 있어서 디지털 자료를 함께 열람해야만 하는 책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서 지난번에는 한 권 정도는 부모님께 추천을 받아 읽고 싶었다. 이 시기의 엄마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꽤나 의지가 넘치는 책을 읽었었지. 여러모로 마음을 단단히 하고 싶었던 엄마의 태도가 드러나는 책 선정이었다.
그리고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걸어볼 수도 있으니까. 괜히 나이를 먹을수록 살갑게 구는 것이 어색하다. 반대가 되었으면 했는데도. 엄마는 책을 꽤나 많이 읽는 편이었고, 그런 엄마가 가르쳐 주었던 것들이 많았다. 나와는 독서 취향이 정반대여서 매번 읽는 책은 추리 소설이나 역사 소설. 아니면 생물이나 과학에 관련된 것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빠가 산에서 캐 온 버섯의 생김새가 찜찜해서 조사해 본 결과 그 친구가 먹으면 안 되는 '미치광이 버섯'이었음을 알 수 있던 것은 엄마가 사두었던 전국 버섯 도감 책이 있어서였다. 나이를 먹고 엄마와 함께 살지 않게 된 후에 처음으로 받는 책 추천이라서 두근두근했지만, 첫 추천은 "재미없게 읽은 책"을 주었다.
몇 번의 허탕 끝에 "그냥 미국 얘기 잔잔하게"라는 코멘트와 함께 추천받은 책은 <히든 픽처스>였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라 <히든 피겨스>가 아닐까 의아해했지만 표지부터 으스스하고 귀신이 그려진 것 같은 이 책이 맞았다. 어떻게 이 책이 "그냥 미국 얘기 잔잔하게"라는 설명이 붙을 수가 있는 걸까? 비교적 신간이라 아직 전자책은 없었고, 미국 원어로 된 책은 전자책으로 열람할 수 있어 영어로 읽었는데, 읽다 보니 이 흥미진진하고 어두침침한 이야기 속에 어떻게 미국의 하루 일과가 잔잔히 그려져있는지 느낄 수 있겠더라.
매번 사람이 죽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왔던 엄마에게는 이 책의 스릴러에 그다지 방점이 찍히진 않는 것 같았지만, 꽤나 잔혹하기도 했다. 사람이 어쨌든 죽고 은폐된 비밀을 추적해가는 스토리가 잔잔하진 않잖아. 책을 다 읽고도 꽤나 마음에 들었던 일러스트를 뒤로하고서도 이 '잔잔하게'라는 단어에 꽂힌 것은 해제되지 않았다. 사람마다 기준과 가치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지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엄마에게 어떤 기준이 있어왔는지는 고려해 보지 못했었다. 나를 다 가르쳤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또 다른 점이 있구나.
그래서 16번째 책은 '나를 가르친 사람이 추천한 책'으로 했다. 비교적 최근일수록 좋고, 비교적 오래전에 가르쳤을수록 좋겠다. 나는 엄마였지만 가족이 아닌 누구여도 괜찮지 않을까.
[100권의 의미]는 책을 100권을 읽으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 책들이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형성하는지 알아보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2021~2023년에 걸쳐 100권을 읽은 후 같은 리스트로 두 번째 100권을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