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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 Dec 23. 2023

<소설가의 영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조작된 아름다움을 모두 품다

준희(이혜영)는 길수(김민희)와 함께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그녀는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고 싶다고 말한다. 경우(하성국)는 준희에게 찍고 싶은 영화가 다큐멘터리냐고 물어본다. 준희는 아니라고 답한다. “나는 그냥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만들 거예요.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진짜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훼손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 그녀가 만들고 싶다는 영화는 얼핏 홍상수의 영화와 비슷해 보인다. 준희는 배우부터 정한 다음에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거라고 말하는데 그건 홍상수가 각본을 쓰는 방식이다. 또한 준희가 술집에서 자신이 쓸 플롯이 어떤 구조일지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 플롯 구조가 홍상수의 영화와 닮았다.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뭐 생일날 같은 거 있죠? 그런 것도 얘기를 할 수 있어요. 생일인데 생일을 까먹었다 남편이. 그래서 사소한 말다툼이 생겼는데 길수 씨가 크게 화가 난 거예요. 길수 씨가 어머님 집으로 도망갔어요. 어머니와 같이 있는데 남편분이 찾아온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길수 씨하고 어머니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그녀가 즉석에서 짠 플롯은 전형적인 홍상수 영화의 플롯이다. 준희는 홍상수와 같은 철학을 가진 그의 분신인 것일까? 홍상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물론 관객은 감독이 아닌 작품 자체를 믿어야겠지만 일단 그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 살펴보자.

- **영화 제작 과정은 어땠나.**


= 김민희 배우와 이혜영 배우가 출연하기로 한 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준비 기간에 소설가가 영화를 찍는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화 속 인물이 만들 단편영화로 뭘 쓸지 생각하던 중 1, 2년 전 직접 만들었던 단편영화가 생각났다. 소형 카메라로 어떤 장면을 즉흥적으로 찍고 그날 편집할 때가 있다. 그런 소품들이 꽤 있다. 그중 이번 영화에 나오는 단편영화는 시나리오도 없고 주제도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와, 배우들이 스크립트에 기반해 연기하는 영화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을 상상했다. 나는 배우들한테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행동해 달라고 주문했지만, 그렇게 해도 단편영화와 스토리가 있는 전체 영화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게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가졌던 출발점 중 하나였다.


(제72회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 홍상수, https://youtu.be/90PBQkGYSME)


확실히 <소설가의 영화>와 ‘소설가의 영화’는 다르다. 두 영화는 형식이 다르다. <소설가의 영화>는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헨드헬드로 찍혔다. <소설가의 영화>는 내내 흑백이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중간에 컬러로 변한다. 길수가 흑백으로 찍어서 아름다운 꽃의 색깔을 담지 못하는 게 아깝다고 말하자,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는 “컬러로 찍으면 되지.”라고 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다음 숏이 컬러로 변한다. <소설가의 영화>의 등장인물에게는 서사가 있지만 ‘소설가의 영화’의 등장인물에게는 이렇다 할 서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가 취하는 말투가 ‘소설가의 영화’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소설가의 영화’에 나오는 김민희가 더 자연스럽다. 애교 섞인 말투로 꽃이 예쁘다 말하면서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인해 와닿는다. ‘소설가의 영화’에는 준희가 말했던 “배우가 자연스럽게 말할 때 나오는 무언가”가 있다. 두 영화의 차이는 명백하다. <소설가의 영화>가 더 픽션에 가깝고 ‘소설가의 영화’가 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전자가 감독에 의해 더욱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가의 영화’의 미덕은 순전히 자연스러운 연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 단편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의 일부다. 이 맥락을 제거하고 보았을 때 ‘소설가의 영화’는 단순히 꽃을 모으는 여자 영상일 뿐이다. 관객은 준희가 찍었다는 맥락에서 이 단편영화를 본다. 그리고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가 찍었을 법한 영화다. 준희는 한때 소설을 많이 썼지만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길수에게 그 이유를 털어놓는다. “소설 쓸 힘이 떨어진 것 같아요. 제가 과장하고 있다고 느껴요. 아주 작은 거를 계속 부풀려야 하는 것 같은 느낌. 근데 부풀리는 게 아니라 내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거. 전 이게 부담스러워요.” 그랬던 그녀가 영화를 찍고 싶어 한다. 과장 없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영화를 찍겠다고 말한다. 이 모든 대사를 들었던 관객이 마침내 ‘소설가의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이 단편영화는 ‘꽃을 모으는 여자 영상’에서 준희의 예술적 비전을 구현한 ‘소설가의 영화’가 된다. 그러니까 <소설가의 영화>와 ‘소설가의 영화’는 상호보완적 관계다.

픽션 같은 장편영화와 다큐멘터리 같은 단편영화가 서로 조응한다. 각자의 다른 특성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의 차이가 중요하다. <소설가의 영화>가 픽션으로서 돋보이는 점은 정교한 인물 묘사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준희가 전망대에서 효진(권해효)과 양주(조윤희)를 만나는 시퀀스를 보자. 양주는 준희에게 카리스마가 있으시다고 말하지만 준희는 부정한다. 그녀는 양주에게 그쪽이야말로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한다. 그 후에 준희는 틈만 나면 효진을 은근슬쩍 공격한다. 효진은 준희가 자신을 비난해도 너털웃음으로 넘어가지만 양주는 준희의 말에 반박한다. 양주와 준희는 직설적이고 효진은 유한 성격이다. 준희가 계속해서 사나운 태도를 보이자 효진은 묻는다. “혹시 전에 그 일로 아직까지 화 안 풀리셨어요?” 듣자 하니 준희는 효진과 작업을 하려 했지만 효진이 거절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효진은 자신이 화가 안 났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그 말은 거짓일 것이다. 세 사람은 전망대를 떠나 공원에 간다. 공원에서 효진은 길수에게 왜 재능이 아깝게 영화를 안 찍냐고 묻는다. 그때 준희는 길수가 배우 생활을 안 하는 건 그녀의 자유라며 화를 낸다. 효진는 너털웃음으로 넘기지만 양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효진을 끌고 자리를 뜬다. 길수는 그 후에 준희에게 “카리스마가 있으세요.”라고 한다. 준희는 양주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을 때는 부정했지만 같은 말을 길수가 하자 알았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관객은 이 대목을 통해 세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준희는 과거에 있었던 일로 인해 효진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 둘째, 준희는 불만이 있을 때 상대방에게 직설적으로 따지고 드는 ”카리스마 있는” 성격이다. 셋째, 준희는 길수에게 호의적이다. 그런데 준희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전반부에 나타난 바와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서점에서 술을 마실 때 시인인 만수(기주봉)는 효진이 했던 말을 그대로 준희에게 한다. 그는 준희에게 왜 소설을 안 쓰냐며 재능이 아깝다고 한다. 준희는 아까와는 달리 웃으며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 준희가 자신이 쓸 (홍상수스러운) 영화 플롯을 설명할 때 만수는 그게 무슨 이야기나며, 이야기는 이야기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준희는 곧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데, 이때 세원(서영화)이 준희에게 두 사람이 무슨 사이였냐고 묻는다.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왜. 이상해 보여?” “처음 봤어요 선생님이 저렇게 다 받아주시는 거.” “그냥 술 먹고 한 번 잤어.” 관객은 이런 사소한 대사들을 통해 인물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매우 정교한 픽션만이 이렇게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특정한 유형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작가가 촬영 과정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자연스러워야 해요.”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인물의 성정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짐작’이다. <소설가의 영화>에는 종종 관객이 사태의 전말을 파악할 수 없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은 준희와 세원이 전망대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대사다. “진짜 크다. 덕분에 이것(전망대)도 구경하고. 유명한 데라면서?” “네. 안에 들어가면 꽤 그럴듯해요. 어쩌면 나중에 작품에 나올 수도 있겠네요?” “어…. 하하하. 근데 이게 만화에 나오는 로봇 닮았다?” 이 장면에서 인물은 전망대의 외양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만 관객은 그 전망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전망대가 스크린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망대 안에서 효진과 양주가 한강을 논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한강이 정말 멋있네. (창밖을 가리키며) 강이 확 굽이치잖아 옆으로. 저기, 저기.”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카메라는 바깥에 있는 한강을 보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카메라가 진상을 포착하지 않는 장면이 많다. 관객은 분식집에서 꼬마가 길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보지만 그녀가 왜 길수를 바라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길수가 바깥에 나가서 꼬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카메라는 분식집 안에만 머문다. 보통 이런 특이한 장면이 나올 때는 카메라가 길수를 따라 나가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포착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전능한 관찰자가 아니라 영화 속 세계에 존재하는 등장인물 같다. 현우(박미소)가 준희나 만수에게 평소에도 작품을 재미있게 읽곤 했다 말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타인은 직접 조사해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카메라는 단숨에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다. 현우가 혼자서도 만수의 시를 읽는 숏만 있으면 관객도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소설가의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장면을 찍지 않는다. 많은 것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둔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자신이 분식집에 앉아있는 준희라고 가정해 보자. 창밖에 길수를 쳐다보는 꼬마가 있어서 길수가 밖으로 나갔다. 따라나갈 것인가? 영화 속 카메라는 그런 상황에 일반적으로 길수를 따라나가지만, 우리는 일일이 따라나가기보다 그저 분식을 먹을 확률이 높다. 함께 있던 친구가 지인을 보고 잠시 대화를 나누고 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상황에서 굳이 친구의 대화를 지켜보려 나가지 않는다. 궁금하면 친구가 돌아왔을 때 누구냐는 질문 한 마디를 던지는 정도가 전부일 테다. 관객이 길수와 꼬마의 대화 내용을 못 듣는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영화 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저런 상황을 조작해서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내기 일쑤다.


인과관계를 분명히 알고 모든 것을 전능하게 파악하는 것은 픽션의 영역이다. 작가는 복선을 정교하게 짜고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상황을 동시에 전하며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이야기를 만든다. 픽션에서는 그런 조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에 비하면 픽션일지언정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영화다. 카메라가 진상을 모두 쫓아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주관적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영화는 준희와 만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효진이 준희에게 어떤 짓을 했던 것인지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은 정교하게 구축된 대사를 통해 짐작을 할 뿐이다. 관객의 짐작은 점점 정교해지고 분명해진다. 그 정점은 ‘소설가의 영화’가 나오는 순간이다. 그 영화는 더없이 준희답다. 과장을 피하고 싶어서 소설을 안 쓰던 사람이 찍은 영화처럼 자연스럽다. 배우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찍은 것처럼 길수가 사랑스럽게 웃는다. 준희가 좋아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즐기려고 ‘소설가의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알기에 단편영화가 아름답다. 준희에 대한 관객의 짐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볼 법한 촬영과 길수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픽션 속 준희라는 존재와 시너지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소설가의 영화’가 끝나고 길수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관객은 또다시 무능해진다. 준희가 사라졌다. 준희는 어디에 갔을까? 극장 직원은 그녀가 옥상에 있을 것이라 말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를 맞이하려고 알람까지 맞춰놓은 준희가 사라진 건 이상한 일이다. 관객의 준희에 대한 이해가 정점에 달한 순간에 나온 이 엔딩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식 범위의 한계를 강조한다. 우리는 결국 준희의 향방을 알 수 없다. 정교하게 짜인 픽션과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현실. 고도의 사유로 만들어지는 의미와, 삶에 태초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의미는 없다는 당혹감. 두 가지가 모두 교차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닌 <소설가의 영화>는 픽션이 줄 수 있는 감각과 다큐멘터리가 줄 수 있는 감각을 모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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