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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모 Nov 17. 2020

최악의 워라벨 대신 얻은 것

미국 대학원 생활에 대해서


 미야모 브런치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글 중 통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글은 “대학원 랩 컨택 메일“이다. 

놀랍게도 해당 글의 조회수는 현재 3천이 훌쩍 넘는다. 해당 글은 작년(2019) 한 해 동안 미국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하던 중 생명 공학 연구실에 인턴 기회를 얻은 경험을 담고 있다. 그 당시 한국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던 나에게 미국 명문대학교에서 학부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다. 겨우 인턴 기회를 얻은 것뿐인데 미국 박사 유학을 떠나는 것을 꿈꾸고 미국에서 성공한 연구자로서 사는 삶을 그리곤 했다. 그 글의 행간에서 그런 나의 철없는 기쁨과 설렘을 느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글은 언제나 쓰인 시점의 시간과 공간만 품고 있다. <안네의 일기>가 2차 세계대전 당시 2년 간의 은둔 생활을 하던 사춘기 소녀의 삶과 그 안의 행복, 기쁨, 슬픔, 두려움, 사랑을 문장, 쉼표, 행간에 한 숨 한 숨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 일기가 더없이 슬프게 느껴지는 까닭은 안네 프랑크의 짧은 생애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과 그 글의 세상은 이제 죽고 없기 때문이다. 

 죽은 시간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회고할 뿐이다. 글이 담은 시간은 유한하나, 그것이 읽히는 나머지 시간도 그 글의 일부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 무거운 이야기는 차치하고, 랩 컨택 메일에 관한 글을 쓴 뒤로 1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빛바랜 시간과 변화한 감정과 퇴색된 설렘은 담기지 못하고 여전히  그곳은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소제목은 ‘학부생으로서 처음 연구실 컨택하기‘ 비슷한 것인데, 막상 랩 컨텍 메일을 쓸 때의 테크니컬 한 노하우를 알려준다거나 소위 이렇게 하면 먹힌다! 같은 꿀팁을 나열해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랩 컨텍 메일 보내는 방법을 검색하고 들어와서는 실망한 독자도 여럿 있을 것이다) 원하는 기회를 얻고자 할 때 그 앞에 놓인 무수한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심스러운 당부와 함께, 열댓 번의 거절 후 마침내 원하는 기회를 얻은 나의 실제 경험담을 아무렇게나 적은 글이었다. 원하는 연구실에서 일할 수 있게 된 당시 나의 기쁨이 승화된 글이었지. 그 이후의 일에 대해 그동안 나는 침묵해왔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실제로 모 후배에게 들은 이야긴데, 구글에 랩 컨택 메일을 검색했더니 내 글이 나오더란다. 그런데 대학원에 관련된 글은 한 편 밖에 없고 나머진 죄다 일상적 감정을 풀이한 에세이밖에 없어서, 이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힘들구나 싶었단다. 사실 그거 내가 쓴 거야. 히히. 나였어. 



 이후의 일에 대해 말하자면, 그 미국 연구실에서 나는 6개월을 내리 일만 했다. 공휴일도 없었고 주말도 없었다. 아, 급여도 받지 않았다. 이 점이 이후의 나를 가장 힘들게 했는데, 이것은 조금 나중에 서술하겠다. 최악의 워라벨은 원하는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한 가치였다. 매일 출근해서 일을 하라고 시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매일 출근해야만 끝낼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생명 공학 실험이란 게 보통 그렇기는 하다. (그래서 세포를 다루는 실험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나는 늘 가슴속 깊이 그대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들의 일상은 생물 실험 재료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져 있다. 살아있는 세포가 갑자기 주말에는 성장을 멈춰 ‘주고’ 밤에는 잠을 자‘주고’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매일 출근했고 그래야만 했고 그게 당연했다. 내 실험 재료는 8일마다 한 번씩 수득률(얼마나 많이 얻었는가)을 측정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월화수‘의 반복이었다. 



 미국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여기서 잘만 하면 나중에 유학할 때 추천서도 받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여기에 진학할 수도 있지 않겠어. 라며 자기 합리화도 하고 나는 행복하다며 자기 최면도 하고 매일 일기를 쓰며 자기반성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매일 출근을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매일 12시간씩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실험을 하고 끝난 적도 많았고, 한 시간 일하고 40분 기다렸다가 다시 한 시간 실험하거나, 실험하고 20분 기다리고 다시 실험하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는 식이었다. 차라리 한 번에 끝내고 말지 어정쩡하게 기계가 일을 마칠 때까지 강제로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은 무엇 하나 몰입하기엔 너무 짧기만 했다. 나중에는 시간 계산에 도가 터서 이것 해놓고 기다릴 동안 저것 해놓고, 그 사이에 밥을 먹고, 논문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읽고, 밖에 나가 잠깐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처음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어서 늘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이번 주말엔 반나절이라도 푹 잤으면 좋겠는데... 몇 시간 뒤에는 꼭 가야 해. 안 그럼 일주일(월화수목금월화수)을 버리는 꼴이야.’ 라면서. 남들(미국인) 다 쉬는 추수감사절에도 출근을 했고 그 와중에 수업은 5개씩 들으며 학교 생활도 충실히 해냈다.  



 미국에 있을 때 나 스스로 진심으로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주변 친구들이 그만 좀 쉬엄쉬엄 해라, 쉬어라고 진심으로 걱정해줄 때도 그 정도는 할 만하다며  괜한 걱정 말라고 오히려 친구들을 나무랐다. 같이 밥 먹고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다섯 번 받으면 그중에 한 번 응하는 식이었다. 친구들과 수다 떨고 노는 행복감보다도 실험을 한 번라도 더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늘 앞섰다. 더욱이 나에게는 출국이라는 데드라인이 있었거든. 너희들처럼 미국 대학생도 아니고 그저 교환학생이라서 , 출국 전까지만 그 실험을 할 수 있었단 말이야. 물론, 한국에 돌아가서도 비슷한 주제로 같은 연구를 이어서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쓰던 재료, 도구들은 이곳에서만 쓸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데드라인 전까지의 결과물이 미국에서의 내 최종 결과물이란 생각에, 어떻게든 그 허락된 기간을 최대한으로 쓸 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한국에 돌아가야만 하는 날짜까지 미국에 있었으면서도 끝내 원하는 연구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다행히 연구실 지도교수님께서는 나의 노력을 끝까지 알아봐 주셨다. 마지막 출근날에는 그동안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며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었다. 그래. 이제 한국에 돌아가 유학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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