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야모 Jan 07. 2021

연말에 혼자 출근한 썰

번아웃

그래. 이제 한국에 돌아가 유학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되는 거였다. 


라며 건강한 생각과 희망에 찬 다짐만 가지고 한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억울했던 순간

 연구실에서  매일같이 출근하고 실험을 했다. 그러나 여느 연구가 그렇듯 목표했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당연한 건데, 인내심은 적고 조급함은 앞서 늘 나 자신을 탓했다. 


 좀 억울한 일이 있었다. 때는 가을 학기 종강 후, 12월 말이었고 캠퍼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연말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던 나에게 연말은 그저 더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학부생으로 치면 더 많이 공부해야 할 시험 기간 같은 때였다. 그걸 아는 랩 선배는 나에게 12월 31일부터 1월 2일 동안 데이터를 뽑는 실험을 시켜두고 휴가를 떠났다. 


 엄청 비싼 원자 현미경으로 데이터를 얻어내야 하는데, 웬일인지 현미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현미경도 자기가 쉬어야 할 때를 아는 것인가. 아무리 껐다가 켜도, 애원을 해 봐도 기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이지 크리스마스 다음날이고 해서, 연구실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커녕 캠퍼스 자체에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주말에 아이와 함께 원반 던지기를 하러 놀러 온 가족이나 간간히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대학원생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원래는 가족들과 보내던 연말에 타지에서 혼자 연구실로 걸어가는 그 길 부터가 참 서글펐다. 


 이제야 생각났는데, 그 당시 내가 연구하던 건물(스탠리) 경비원 아저씨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매번 건물 문을 닫을 때 까지 실험을 했고, 새벽 두세시가 다 되어야 퇴근을 했으니까. 그 경비원 아저씨는 건물에 갇힌 나에게 문을 열어주고,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면 알려주고, 카드키를 놓고 오면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셨다. 우버 기사가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매일 같이 수다를 떨었다. 


 그래. 원자현미경으로 돌아와서, 참 예민한 이 (기계)친구는 여전히 말을 안 들었다. 데이터 뽑는 숙제는 될 리 없고, 학교엔 아무도 없어 외로운 와중에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2020년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만큼은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 해의 마지막 날도 연구실에 있던 나는 할 일을 제쳐두고 2019년 12월 31일 저녁을 친구 집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휴가에서 돌아온 선배로부터 너 같은 사람과는 연구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기한 내에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혼자 고칠 수 없는 종류의 결함이었지만, 기계가 고장 나서 못 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핑계였다. 고장 난 기계로 뭘 어찌하나 싶긴 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망한 데이터라도 보냈어야 했나 싶다. 자기는 일주일 동안 휴가였으면서, 단 하루도 내게 쉬라고 하지 않은 그 선배는 그렇게 나쁜 말을 내뱉고는 한 동안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속상했는데, 억울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더 슬펐다. 


 그 날 핸드폰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사진을 좀 오래 봤다.




모두가 아는 '그' 질병


 귀국 하기 직전 2020년 1월 말,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독감 백신을 맞으라고 권고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유학생들도 학생 비자를 통해 무료로 독감 백신을 맞을 수 있었고, 그 당시에만 해도 코로나를 여느 겨울철 독감처럼 한 번 유행하고 지나갈 그럴 질병으로 생각했다. 


 그나마 조금 섬뜩했던 순간은, 글쎄 약국에 갔는데 모든 Drug store마다 마스크 품절이라는 표시를 봤을 때다. 설마, 이렇게 큰 땅덩어리에서 마스크가 품절되겠어 싶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더 치열한 마스크 전쟁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스튜어디스에게 타이레놀을 부탁했는데, 내 양 옆자리 사람들 모두 나를 보더니 갑자기 마스크를 올려 쓰고 미심쩍어했다. 그냥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한국에 도착하고 3월 1일에 있을 개강 준비를 위해 학교가 있는 광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엄청난 짐을 풀었다가 다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갈 짐을 쌌다. 그러나 불길한 뉴스는 어김없었고, 연일 개강 날짜가 미뤄져 갔다. 그 해 여름에는 GRE 준비를 해서 가을에는 미국 대학원 apply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얼른 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야 되는데. 


 속절없이 미뤄지는 개강 날짜와
늘어만 가는 강제 휴식 기간, 
나는 무너졌다.

 


 버클리에서 분명 의미 있고 알찬 교환학생 생활을 했다. 


 수업을 5개 들었고, 생명 공학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고. 그 와중에 앞으로의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비즈니스 컨설팅 동아리, idea factory도 했다. 정신없이 알찬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그제야 밀려드는 후회와 좌절에 끝도 없이 잠겨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느라 돌보지 못했던 내 안의 '나'가 울기 시작한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악의 워라벨 대신 얻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